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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를 지나며 이 불볕더위를 ‘잠시 시련이다, 가혹한 대가다’라고 생각해 보았다. 끓는 물에 적셨다 꺼낸 종이처럼 옷들이 고통스럽다.” 29세의 나이에 요절한 천재 시인 기형도가 1988년 8월 <짧은 여행의 기록>이라는 산문에서 묘사한 한여름의 더위이다. 그런데 30년이 지난 올해의 끔찍한 더위는 잠시의 시련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구를 착취해온 것에 대한 가혹한 대가임은 분명하다.

지금 화두는 기후 변화에 따른 냉난방의 복지이다. 기후정의는 기후변화가 냉난방 시설을 이용할 수 없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문제에 대한 대응이고, 기후형평성은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에 관한 문제이다. 기후정의를 위해서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냉난방 복지 혜택을 제공하고, 동시에 국민들이 고통스러운 혹서기를 대처할 수 있도록 하는 정부정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한시적인 주택용 누진제 완화가 발표되었고 관련 제도의 변화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냉난방 복지뿐만 아니라 폭염으로 인한 농축산물 피해와 그에 따른 파급효과도 커지고 있다. 이제는 기후변화가 초래할 문제들을 미리 예측하고 단기적이고 직접적인 대응 정책과 함께 장기적, 철학적, 기술적 방향과 정책들을 고민해야 한다. 기후형평성의 차원에서 산업화의 혜택을 누려온 선진국과 기업이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지구온난화로 인한 살인적 폭염은 기후형평성에 대해 설왕설래하는 것조차도 사치로 만들어 버렸다.

환경인식 제고를 위한 캠페인의 영향으로 환경파괴와 기후변화에 대한 인식은 높아졌으나, 친환경 행동은 아직 미미하다. 그 이유는 환경 희생을 기반으로 하는 생산과 소비 그리고 생활 방식이 가지는 구조적 문제 때문이며 친환경 행동을 위해서는 시간, 비용 노력이 들고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경제·사회적 문제뿐만 아니라 심리적 장벽이 친환경 행동을 더욱 방해하기도 한다. 개인의 행동은 너무 미미해서 환경과 기후변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무력감이 대표적인 심리적 장벽이다. 기후변화는 개별지역 차원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글로벌 차원의 문제이다. 심리적으로 그룹의 규모가 클수록 그리고 개인의 기여가 익명일수록 개인의 노력으로 인한 변화가 적게 느껴진다. 그러니 기후변화 경감을 위한 개인의 역할이 너무나 미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무력감은 기후변화 자체를 부정하는 현상으로 전이된다.

환경심리의 권위자인 로버트 기포드 교수는 개인이 기후변화 경감을 위한 자신의 노력을 타인과 비교할 때, 불공평을 지각하게 되고, 이는 기후변화 경감을 위한 행동을 방해한다고 밝혔다. 지각된 불공평은 코먼스 딜레마(Commons Dilemma)라는 사회적 딜레마로 대변된다. 코먼스 딜레마는 개인의 단기적 이기심이 공동체의 장기적인 공익과 상충할 때, 많은 사람들이 사익을 추구하게 되면 공동체 전체는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지만, 타인이 공익을 위해 함께 협조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노력은 무의미한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으므로 선택에 딜레마를 갖는다는 것이다. 코먼스 딜레마는 기후변화 경감을 위한 우리의 선택적 딜레마를 대변한다. 개인의 노력이 기후변화를 경감시키지 못할 것이라는 무력감과 코먼스 딜레마가 결합되어 다른 사람들의 협조가 없으면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기후변화를 경감시키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개인적 노력은 헛일이라는 무력감을 강화한다.

기후변화에 대한 무력감과 코먼스 딜레마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작은 실천을 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행동들이 습관화되고 친환경이 사회적 규범이 되어야 한다. 환경부를 비롯해서 관계기관과 지자체는 구체적인 실천 강령을 제시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특정한 행동들을 함께하는지 지속적인 설문조사 등을 통해 수치화해서 제시하고, 특정한 행동이 만들어 내는 긍정적인 결과를 구체적으로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지구를 살리기 위해서는 소수의 완벽한 친환경활동가들보다 작은 실천을 하는 다수가 절실하다. 두려운 것은 곧 불어올 찬 바람으로 폭염이 뿜어내던 착취당한 지구의 신음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올해의 무더위를 겪으며 모두가 외면하고 싶지만 가슴속 깊이 느끼고 있는 불안과 불편한 진실은 기후변화의 가속화이다. 올해의 폭염이 재앙의 페달이 될 것인가, 아니면 더 늦기 전에 우리 행동의 변화를 이끈 축복이 될 것인가?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

<황금주 | 중앙대 교수 경영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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