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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92세로 생을 마감한 연기자 최은희. 그의 삶에는 한국영화사와 함께 남과 북이 담겨 있다. 그가 출연하여 1985년 모스크바 영화제 여주연상을 받았던 작품은 <소금>, 1930년대 만주 간도를 배경으로 반식민지 항일투쟁을 그린 강경애 원작이었다. 신상옥 감독과 함께 북에서 찍은 영화다. 신상옥의 역량이 발휘된 수작으로, 남쪽 영화가 북쪽 영화에 의도치 않게 기여한 대목이다. 최은희의 연기 또한 깊은 감동을 준다.
그렇지 않아도 내년은 한국영화 100주년이 되는 해인지라 이를 기념하여 ‘국립영화박물관 건립 추진위원회’가 지난 2일 발족했다. 정지영·봉준호 감독, 연기자 안성기·장미희 등 영화계 주요 인사들이 나섰다. 한국영화의 역사성을 공식적 수준으로 정리해야 한다는 인식의 열망이다. 2019년은 더군다나 3·1운동 100주년과 겹치는 시기라는 점에서도 이를 계기로 한국영화인들의 남북 교류를 의미 있게 준비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오는 27일 남북정상회담까지 예고되어 있는 마당에 이러한 작업은 더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영화만큼 대중들의 현실인식에 막강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없다는 점에서, 남과 북의 좀 더 진전된 소통에 영화가 이바지할 수 있는 바는 상상 이상이다.
한국영화는 이제 그 힘이 사뭇 다르다. 미국이야 말할 것도 없으나, 중국과 인도 등 수입영화를 제한하는 국가를 빼놓고는 드물게 자국 영화 점유율 50%를 유지하고 있다. 할리우드의 영향력을 극복해낸 것이다. 1919년 10월27일 <의리적 구투>가 단성사에서 개봉된 이래 한국영화는 그야말로 파란만장의 역사를 걸어왔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독재정권의 검열과 간섭, 분단체제의 제약, 그리고 미국의 영화시장 개입으로 이어진 현실과 끊임없이 싸워온 영화인들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한국영화는 없다. 한국영화의 내면에 그 출발의 기원과 동시대인 3·1운동의 정신적 역량이 숨 쉬고 있는 덕분이다.
그런 까닭에 정치권력이든 시장권력이든 영화인들의 자존감을 무너뜨리고 영화판을 독점하고 왜곡시키려 드는 순간, 영화인들은 그대로 침묵하지 않았고 저항해왔으며 마침내 자신들의 문화 권리를 지켜냈다. 특히 영화시장의 유통구조를 미국의 자본시장에 종속시키려는 법과 제도에 대한 반대는 영화인들의 집단적 결속력을 강화시켰다.
정통성 없는 전두환 정권이 미국의 한국영화시장 장악에 길을 열어주기 위해 그전까지는 한국 국적을 가진 이들에게만 허용되었던 영화제작과 유통관련법을 아무도 몰래 슬쩍 개정해버리자 싸움은 매우 치열해졌다. 자칫하면 한국영화는 고사할 판이었다. 이때 직배영화 상영관에 꽃뱀을 푼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어느 언론도 직배 반대에 관심을 갖지 않자 ‘사고’를 친 것이었다. 하지만 뱀이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꼼짝 않고 있는 바람에 현장에서 관심도 못 받고 상황은 종료되었다. 결과적으로 사고를 치지 못한 셈이었다. 지금이야 좀 유치했던 거 아닌가 하고 웃고 넘길 일이 되었지만, 한국영화의 운명이 기로에 서 있는 판국에 그대로 당할 수 없다는 영화인들의 당시 절박한 저항방식이었다.
이 과정에서 영화인들은 단단히 각오를 다졌다고 한다. 문화권리의 독립이 없다면, 그리고 영화를 정말 잘 만들지 않으면 한국영화의 미래는 없다고. 이후 이런 자세는 스크린쿼터 지키기 운동, 검열철폐운동 등으로 이어지면서 한국영화의 체력을 튼튼하게 만들었다. 평창 동계올림픽이 문화예술 교류가 가진 힘과 가치를 입증해주었다는 걸 기억한다면, 영화인들의 남북교류는 또 다른 지평을 우리에게 열어줄 것이다. 가령 분단이데올로기에 균열을 낸 <남부군>에서부터 부패한 권력을 까발린 <더 킹> 등을 북한주민들이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남북정상회담이 평화협정으로 가는 길을 열어나간다면, 영화의 남북 교류는 그 위에 문화예술의 열차를 서로 달리게 할 것이다. 남북 합작 영화, 기대되지 않는가? 그렇게 탄생할 ‘코리아 영화’, 경쟁력 엄청난 세계적 드라마가 될 게 분명하다.
<김민웅 | 경희대 교수·미래문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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