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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에 한 번씩 만나 시를 이야기하는 모임이 있다. 십여년 전 사이버대에서 시창작 강의를 할 때 만난 학생들인데 졸업을 하고 나서도 인연이 계속되고 있다. 12년째다. 그사이 등단을 한 친구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냥 시가 좋아, 시와 더불어 사는 소시민들이다. 하는 일, 사는 곳이 다르고 생각하는 방식도 다르지만 시에 대한 애정만큼은 서로 다르지 않다. 신뢰의 공동체라고 해도 좋겠다. 어떤 때는 피붙이보다 더 끈끈해 보인다.

이번 4월에는 <패터슨>이라는 영화가 화제에 올랐다. 시와 시인에 관한 영화여서 ‘독후감’이 다양했다. 영화를 관람하지 못한 나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시가 주인공”이란 평이 인상적이었다. 시가 갖고 있는 장소성(placeness)에 주목했다는 친구도 있었다. 며칠 뒤, 인터넷에서 영화를 다운받았다. 4500원.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 제격이지만 상영관이 많지 않아 집에서 보기로 했다.

배우들은 낯설었지만 감독 이름은 낯익었다. 짐 자무시. 시인이 주인공인 데다 평생 독립영화만 찍어온 감독이었으니 이른바 속도감이나 흥미진진한 장면은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패터슨’은 미국 뉴저지주의 소도시인데 주인공 이름이기도 하다. 패터슨에 사는 패터슨이 하는 일은 버스 운전인데 특이하게도 매일 시를 끄적인다. 패터슨이 시에 집중할 때는 운전이 부업처럼 보인다.

잠깐 시인에게 어울리는 직업은 무엇일까 궁리해봤다. 내가 아는 시인들 중에 남다른 직업을 가진 이들이 몇 있다. 마도로스도 있고 경찰관도 있다. 백혈병 전문의도 있고 꿀벌 치는 분도 있다. 공무원, 기자, 중소기업인, 교사, 사진가, 농부도 있다. 그러고 보니 거의 모든 시인이 직업을 가지고 있다. 시만 써서 먹고사는 소위 ‘전업 시인’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시를 쓰기 위해 ‘부업’을 가져야 한다. 부업이라는 생업이 없으면 시를 평생 천직으로 삼지 못한다. 시인 역시 직업을 가져야 하는 엄연한 생활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시인에게 어울리는 직업이 따로 있을 리 만무하다.

시인 패터슨은 ‘부업’으로 버스를 운전한다. 버스란 무엇인가. 노선을 벗어날 수 없으며 배차 시각도 준수해야 한다. 그러니 버스를 소시민의 삶에 비유해도 부자연스럽지 않다. 패터슨은 매일 아침 6시15분경 눈을 뜨고 도시락을 들고 출근한다. 매일 아침 운행 직전 운전석에 앉아 시를 쓴다. 점심시간에도 벤치에 앉아 시를 쓴다. 시 공부 모임에서는 시가 주연이라고 했는데 내 눈에는 ‘반복되는 일상’ 또한 주인공으로 보였다. 도시에서 누가 일상의 틀을 뛰어넘을 수 있단 말인가. 버스가 노선을 벗어날 수 없듯이 소시민 또한 반복되는 일상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버스기사 패터슨의 시 쓰기는 전혀 다른 의미를 획득한다. 패터슨의 시 쓰기는 참여관찰을 넘어 ‘내적 균열’을 일으킨다. 패터슨은 일상적 삶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생업과 생활의 안쪽에 똬리를 틀고 앉아 일탈을 감행한다. 그렇다고 그의 시가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하거나 문명을 비판하는 메시지를 담아내는 것은 아니다. 그는 몽상하는 눈길로 일상과 사물을 관찰한다. 성냥갑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담배, 당신은 성냥’과 같은 문장을 빚어낸다.

패터슨이 존경하는 시인이 있다. 패터슨 자신이 나고 자랐으며 앞으로도 살아갈 소도시가 자랑스러워하는 시인이 있다. 패터슨에서 소아과 의사로 활동하며 시를 쓴 카를로 윌리엄 카를로스(1883~1963). 카를로스는 도시 노동자와 어린이의 일상생활을 자신의 시에 초대했다. 카를로스 시의 특징은 구어체를 활용해 도시 풍경을 스냅사진처럼 보여주는 것인데 이와 같은 시작법을 통해 미국 현대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평을 듣는다. 패터슨의 시의 발원지가 자신의 고향에서 살다간 시인 카를로스다. 패터슨은 카를로스의 시집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영화를 보면서 20여년 전에 본 영화 <일 포스티노>가 떠올랐다.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사설 우편배달부로 고용된 청년 마리오는 마을 아가씨를 짝사랑하면서 시의 내부로 한 걸음씩 진입한다. 마리오는 급기야 시의 거장으로부터 ‘개인 교습’을 받는데, 네루다가 일러준 시의 요체는 메타포였다. 서로 무관한 A와 B를 결합시켜 C, 즉 새로운 의미를 탄생시키는 은유가 시의 핵심이라는 것. 패터슨, 아니 짐 자무시에게 시란 무엇이었을까. 내가 보기에 짐 자무시는 ‘시는 관찰과 발견’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낯익은 것에서 낯선 그 무엇을 찾아내는 일’이 시 쓰기다.

은유 또한 관찰과 발견의 한 결과이므로 마리오와 패터슨의 시는 서로 다르지 않다. 문제는 시를 시이게 하는 요건이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소시민의 재탄생이다. 소시민이라면 누구나 생계수단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시 쓰는 버스기사나 집배원은 흔치 않다. 물론 누구나 다 시를 쓸 필요는 없다. 하지만 누구나 ‘다른 눈’을 가질 수는 있다. 일상적 삶의 안쪽에서 자신의 삶과 사회를 응시하는 능력 말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지금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면, 그리하여 우리가 저마다 ‘시의 마음’을 되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과 다른 세상’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돌아보니 시 모임에 참석하는 벗들이 저마다 패터슨이었다. 다음달, 영화 <패터슨>을 놓고 토론을 벌여볼 생각이다. 도시의 공유기억, 버스와 공공재, 현대인과 장소 상실, 시의 사회적 역할 등 묵직한 주제에 대한 우리 패터슨들의 견해가 궁금하다.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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