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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관계란 ‘권리와 의무’의 관계다. 법률관계인 고용에 있어 권리와 의무는 한 쌍을 이룬다. 임금을 정하고 인사권과 징계권을 가지는 사용자는 권리의 이면에 사용자로서 의무를 부담하는 것이다. 정당한 임금을 지급할 의무, 산업안전을 보호할 의무가 있으며, 법원은 “고용 또는 근로계약에 수반되는 신의칙상 보호의무”를 위반한 사용자에게 배상책임을 부과해왔다.      

현대사회에서 ‘권리만 있는 사용자’와 ‘의무만 있는 근로자’를 상정할 수 있을까. 이런 관계는 ‘전근대적’이라 부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한국마사회와 기수의 관계에서 마사회는 오로지 권한만 있고 아무런 의무가 없다. ‘한국마사회법’부터가 그렇다. 기수 면허의 발급 요건을 정하는 일, 면허를 정지하거나 취소할 권한은 마사회의 재량에 맡겨져 있다(법 제14조). 마사회와 마주의 조심스러운 관계와는 매우 다른 모습이다. 마사회가 누군가의 ‘마주 될 권리’를 제한하려면 법률이 정한 엄격한 요건을 따라야 하나(법 제11조), ‘기수 될 권리’를 제한하는 요건은 제 마음대로 정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마사회 부조리 운영을 비판하며 극단적 선택을 한 고(故) 문중원 기수의 유족과 시민대책위가 13일 정부의 문제해결을 촉구하며 청와대로 행진하고 있다. 연합뉴스

마사회가 정한 규정을 보면, 기수가 되려는 자는 마사회가 운영하는 ‘경마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된다. 이때 교육생은 ‘상해보험 증명서’를 원장에게 제출해야 한다(기수 양성 규정 제27조의2). 교육을 받기 전에 자비로 민간보험부터 가입해야 하는 것이다. 교육과정에 앞서 ‘서약서’도 제출해야 하는데, “어떠한 처분에도 일체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마사회에 재산상의 손해를 끼친 경우 지체 없이 이를 변상한다”는 등 불공정한 관계가 명시되어 있다.

기수가 되어 상금을 지급받을 때, 상금의 책정과 배분 역시 마사회 마음이다. 마사회의 상금 관련 규정에 “관계자와 협의할 수 있다”고는 되어 있으나 의무사항이 아니다(경마 시행 규정 제93조). 사실상 마사회가 결정한 상금은 “우승열패(나은 자는 이기고 못난 자는 진다)의 원리”(위 규정 제94조)에 따라 기수에게 배분된다. 십수명이 출전하는 경기에서 5위까지만 상금을 주는 승자독식 규정은 마사회가 일방적으로 정한 것이며, 배분율을 결정하는 데 기수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 의무 역시 없다.

부산경남경마공원에서만 7명의 기수와 말관리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데에는, 이처럼 전근대적 권리관계에 짓눌린 채 미래를 그려볼 수 없었던 종사자들의 사정이 있다. 마사회는 기수의 양성부터 퇴출까지 권한 일체를 지닌 채, 고용관계의 핵심인 임금 결정권과 징계권을 행사하면서도 아무런 의무를 지지 않았다. 사고가 빈번했음에도 사업장 안전관리 책임은 조교사나 기수에게 떠넘겼다. 마사회는 경마사업의 시행 주체일 뿐 사용자가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최근 법원은 직접적 근로계약 관계가 없더라도 노동자의 임금 결정과 징계권 등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면 해당 부분에 관하여 사용자로서 노동조합과의 교섭에 응할 책임을 인정하고 있다. 경마산업 종사자들이 더 이상 다치거나 목숨을 잃지 않도록, 공기업으로서 책임감 있는 태도를 보이기를 촉구한다. 마사회에 주어진 권한의 크기만큼, 균형 있는 책임을 져야 할 때다.

<김수영 |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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