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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 TV 프로그램 <힐링캠프>에 출연한 박근혜가 “저는 대한민국과 결혼했어요”라고 말했을 때 나는 그냥 얼어붙어 버렸다. 현직에 있던 대통령과 영부인을 총탄에 보낸 경험을 안고 있는 국민들은 그들의 딸 앞에서 연민의 정에 포박당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의 후광 앞에 그의 지도자적 자질이나 인간됨, 성격 등은 보이지도 않을 것이니 그런 과거를 가진 사람을 이길 수 있는 후보는 없어 보였다. 일상 속에서 서로 사랑하고 슬퍼하고 사소한 일에 기뻐하기도 하며 질박하게 삶을 만들어가는 일반적인 국민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삶을 살아온 그가 대통령이 된다면 정말 큰일 나겠다는 위기감이 나를 짓눌렀다. 그리고 4년10개월 뒤인 지난 11월 영국 BBC는 박근혜 스캔들을 ‘셰익스피어의 희곡감’이라고 보도했다.

쿠데타로 집권해 산업화를 이룬 박정희의 딸로 태어나 권력의 보호막 밖에서 단 한순간도 살아보지 않은, ‘완전히 기이한 환경’에서 성장한 그가 갑자기 국회의원이 되고, 그 ‘기이한 환경’의 힘으로 대통령까지 되었다가 40년 지기 최순실에 의해 꼭두각시처럼 조종당한 결과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 스토리는 그 어떤 희곡보다 훨씬 극적이다.

2012년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 시절 출연한 SBS <힐링캠프>.

11세기 스코틀랜드의 장군이었던 맥베스 이야기를 셰익스피어가 희곡으로 만든 것도 극적 운명 때문이었다. 맥베스는 왕이 될 것이라는 마녀들의 예언을 믿고 권력에 대한 욕망에 눈이 멀어 자신이 모시던 왕을 죽이고 권력을 쟁취했다. 그러나 그도 결국 죽음을 앞에 두고서야 “악마의 예언에 눈이 멀어서 내가 이렇게 고통받아야 하다니…. 하늘과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나, 저주받은 왕관 때문에 이렇게 죽는구나”라고 한탄을 쏟는다. 그는 적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강력한 용맹을 가졌지만 마녀의 예언을 믿을 만큼 어리석었고, 그의 머릿속엔 권력의 욕망 이외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연설문 하나 자기 힘으로 작성하지 못하는 어리석음과 집요한 권력욕을 이용하여 대통령을 지배한 최순실은 맥베스를 죽음으로 이끈 마녀와 똑같은 역할을 하였다. 희곡 속 맥베스의 마녀는 처벌받지 않았고, 현실의 박근혜는 자신이 완전히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아직도 모른다는 것만이 다른 점이다.

눈먼 권력자의 운명은 2000년 전 소포클레스가 오이디푸스왕을 통해 이미 비극의 전형으로 묘사한 바 있다. 오이디푸스는 아비를 죽이고 어미와 결혼할 것이라는 신탁의 예언을 피하기 위해 방랑길에 올랐고, 아무도 풀지 못했던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 정도로 지혜로웠다. 그러나 세 갈래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행인과 다투다가 그가 아비인 줄 모른채 왕을 살해했다. 왕이 된 오이디푸스는 그녀가 어미인 줄 모르고 선왕과 사별한 왕비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은 절대로 결백하며 죄는 오직 다른 사람만이 지을 수 있다는 중대한 착각과 오만에 빠져 있었다.

그는 선왕 살해사건의 전말을 파헤치다 결국 자신이 범인이라는 사실과 자기정체를 알게 되었다. 어미이자 아내인 왕비가 자결을 하자 그는 왕비의 브로치로 자기 눈을 찌르고 절규하며 파멸하게 된다. 오이디푸스의 운명을 비극으로 만드는 것은 그의 타고난 ‘운명’과 자신은 완결하다는 ‘오만’이었다. 일반국민의 삶을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박근혜는 크나큰 폐해를 덮어버린 산업화의 신화로 포장된 박정희의 후광과 부모의 죽음에 대한 국민적 동정심으로 대통령이 되었으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은 결백하며 모든 잘못은 주변 사람들에게 있다는 독선과 오만으로 스스로를 파멸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2000년 전의 오이디푸스와 너무도 닮았다.

맥베스는 마녀에게 속았고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오만함에 속았다면, 오늘날은 박근혜라는 기이한 운명의 권력자에게 온 국민이 속았기 때문에 같은 실수를 다시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 과정과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은 독선과 오만으로 위법행위를 한 대통령을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하게 수사하고 강력하게 처벌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희곡 중 비극의 목적은 ‘공포와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켜 감정을 정화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 눈앞에 벌어진 현실에서 분노에 가득한 국민의 감정을 정화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법에 따른 처벌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거리로 나선 수백만 국민들의 가슴에 메워질 수 없는 커다란 구멍을 만들 뿐 아니라 제2, 제3의 박근혜의 등장을 보게 될 것이다.

송호창 | 존스홉킨스대 방문교수·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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