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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동부리. 1946년 열세 살 때 맨발로 짚으로 얽어 만든 공을 차고 있는데 어머니께서 아버지가 서울 가면 축구화 사준다 하셔서 아버지 손을 잡고 삼팔선을 넘었다. 어머니와 큰형과 누나는 북에 남았다. 74년이 흘렀다.
지난 9일 병원으로 가셨을 때 심장의 관상동맥 3개 중 2개는 완전히 막히고 마지막 하나조차 이미 혈관이 서너 번 터진 상태에서 겨우 혈액을 수송하고 있었다. 긴급 시술에 나선 의사는 “이미 돌아가실 뻔했는데 기적적인 상황에서 겨우 길을 틀 수 있었다”고 했다. 병원에 들어가셔서 마지막 하신 일은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 11년 투쟁에 대한 연대의 글 마무리였다. 며칠 전 4월23일 다시 여덟 시간에 이르는 대수술을 받고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 계신다.
선생님의 조부였던 백태주 선생은 3·1운동 때 수천장의 태극기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눠주셨다.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대다가 일경에 발각, 고문 끝에 옥사당하셨다. 탈옥한 백범 김구 선생을 집에 한동안 피신시키시기도 했다. 그 인연으로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왔을 때 백범 선생께서 공부를 시켜주겠다고 했지만 아버지께서 혁명가가 되든, 깡패가 되든 스스로 살아야 한다고 하셨다. 초교 4년이 전부였다. 중학교에 가고 싶어 청계천 중고책방에서 영어사전을 몽땅 외워 영어가정교사도 했다. 백범 선생과 인연이 이어져 1967년 백범사상연구소를 열기도 하셨다. 1950년대엔 농민운동과 도시빈민운동을 배웠고, 1964년 한일협정반대운동을 계기로 민주화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1974년 장준하 선생과 함께 유신헌법철폐 100만인선언 운동을 주도했다가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12년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1979년엔 ‘YWCA위장결혼사건’을 주도해 다시 계엄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살덩이가 떨어지고, 손톱이 뽑히는 모진 고문을 받고 감옥살이를 하셨다. 독방 천장에 입으로 쓴 시 ‘묏비나리’가 ‘님을 위한 행진곡’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1987년 분단 이후 최초의 노동자민중 대선후보로 떠밀려 나서기도 하셨다. 어떤 민속학자보다도 우리 말과 민중문화와 민족문화에 탁월하셨다.
황석영의 ‘장산곶매’도 원전은 선생님이었다. ‘달동네, 새내기, 동아리, 모꼬지…’ 수많은 우리말이 선생님을 통해 살아났다. 하나의 대륙이었고, 산맥이었고, 광야와 같은 분이었다.그렇게 여든 여섯이 되셨다.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에 단 한 번도 안 빠지셨다. 한 발 떼기도 힘든 광장에서 늦은 밤까지 버티기 위해 전날 저녁부터 물을 마시지 않았다고 하셨다. 어떤 날은 어쩔 수 없이 앉은 채로 바지를 적시기도 했다며 웃으셨다. 저항하는 거리에서 싸우다 쓰러져야 하는데 이게 무슨 꼴인지 모르겠다고 하신다.선생님께 무엇을 해드릴 수 있을까. 무엇보다 선생님은 아직 걸을 수 있을 때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동부리 고향에 가서 어머니 무덤에 절이라도 한번 드리고 싶다 하신다. 한번만 그 고향 바닷가 푸른빛을 보고 싶은데 서울에서 전주 가는 거리보다 가까운 그곳을 74년째 갈 수 없으니 참 아픈 땅덩어리라고 하신다.
선생님은 그간 모든 고통 받는 노동자민중의 곁에 서 계셨다. 평화와 통일의 길에 서 계셨다. 모두의 평등을 기원하는 길에 서 계셨다. 여든 노구에도 젊은 우리보다 더 많은 연대를 다니셨다. 수술이 끝난 뒤 중환자실 가족 면회시간에 따라 들어갔는데 아직도 마취 상태로 깨어나지 못하고 계셨다. 옷매무새 한번 흩트리지 않던 선생님인데 온몸에 멍이 남고 수많은 관들이 꽂혀 있는 초췌한 모습이 눈시울 뜨거워 차마 볼 수가 없다. 선생님, 빨리 일어나셔서 거리로 다시 나가셔야죠. 갈깃머리 휘날리며 또 호통을 치셔야죠. 무엇보다 어머니 뵈러 고향에 가셔야죠. 저 통한의 삼팔선은 한번 넘고 가셔야죠. 서울대병원 로비 대형TV에서 남북정상회담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열세 살에 떠나와 여든 여섯. ‘백기완의 북녘길’ 평생을 반독재 민주화, 평화와 평등을 향해 살아오신 선생님께서 훌훌 털고 일어나셔서 이제 막 열려가는 평화와 통일의 길에 소박한 걸음 함께하실 수 있게 우리가 마음을 모아주었으면 좋겠다.
<송경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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