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한 시대의 언어는 우리의 현재적 삶을 예후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보통 언어를 도구로 우리의 생각을 주체적으로 표현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그 반대의 관계가 성립하는 경우가 더 많다. 우리의 사유는 우리가 쓰는 언어, 우리를 둘러싸거나 불현듯 다가오는 언어에 압도당하고, 바로 그 언어들에 의해 일정한 방향으로 틀이 지워지곤 한다. 가정과 학교, 직장과 미디어를 통해 일상적으로 접하는 언어는 우리를 구성하고, 우리의 존재 자체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마르틴 하이데거는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 하고, 미셸 푸코는 ‘저자는 무엇인가’라고 반문한 것일까. 언어의 힘을 강조하는 시각을 단순히 언어주의적 입장으로만 볼 수 없는 증거들을 우리는 바로 ‘지금 이곳’에서 목도하고 있다.
지난해 말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일본과의 협상에서 외교부 장관이 강조했던 ‘최종적, 불가역적 해결’이란 표현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무력감을 지우기 어려웠고 이는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것일 듯하다. 물론 엄중한 국제질서하에서, 그런 표현을 쓸 수밖에 없는 일련의 외교적 요인이나 유사한 구조적 강제가 있는 건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건 이내 기이하고 불가해한 느낌으로 바뀌었다. 살아있는 역사, 사건의 당사자들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은 현재진행형의 역사에서 최종적이고 불가역적 합의는 무엇이고 이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뉴질랜드, 네덜란드, 대만, 필리핀 등 다른 나라의 위안부 피해자들과 이들의 보편적 인권 문제는 여전히 국제적으로 뜨거운 이슈인데, 이것이 양국 간 정치적 합의의 결과로 되돌릴 수 없이 정리될 수 있는 것인가, 평화의 소녀상을 철거한다는 것은 이러한 협상을 통해 결정될 수 있는 것인가 등 많은 질문이 복잡하게 머릿속을 맴돌았다.
6월민주포럼 회원들이 일본군 위안부 협상 파기와 소환장 발부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_연합뉴스
서구 언론들이 위안부 합의는 일본과 미국의 승리라 논평한 것, 또 복잡한 동북아 정치 지형 내 양국 외교관들이 주어진 제약하에서 얻을 수 있는 최선의 합의였다는 국제적 평가를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러한 언어는 자명하게 국가를 대표하는 장관의 외교적 언사로 부적절하다. 이른바 국가의 격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부 차원의 정치적, 외교적 해법을 넘어 피해 할머니들과 그 가족들, 합리적으로 문제제기하는 시민사회, 무엇보다 국민들과의 소통이 없는 최종적이며 불가역적인 합의는 어불성설이다.
현 정부의 노동개혁 담론 또한 언어가 지칭하는 대상과의 관계를 왜곡시킨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노동개혁이란 최저임금 규정이나 기업의 초과이익을 공유하고 단체행동권을 보장하는 등 노동자의 권익 보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정부는 노동개혁 담론을 통해, 이 단어가 함의하는 많은 의미들 중 저성과자의 일반해고 가능성과 취업규칙 변경요건 완화 등 쉬운 해고와 고용 불안을 가중시키는 노동시장의 재편, 노동관계법의 개편으로 ‘편의적으로’ 환원해 사용하고 있다. 고용노동부의 최근 공익광고들, 이를테면 임금피크제가 청년 일자리를 늘리는 마중물 역할을 한다거나 공정인사는 능력을 키워 새로운 기회를 만든다는 것은 이러한 언술을 시대정신으로 만드는 데 일조한다. ‘내 인생 또 하나의 찬스 노동개혁’이란 카피는 안 그래도 힘겨운 청년세대가 직면한 문제의 근원이 마치 기성세대에게 있다는 뉘앙스로,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고 세대 간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시대착오적 언어들에 분노하고 공통감각을 회복하는 일, 나아가 언론과 시민사회, 아니 우리 모두가 힘을 모아 문제적 언어들을 낯설게 하고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이는 어느 순간 상식이 되고 우리를 그 프레임 안에서 생각하고 행위하게 할 것이다. 역사의 다의성의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전시 중 적국의 군대에 유린당한 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는 정부는 누구를 위한 정부인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한 피해자 할머니의 ‘당신, 어느 나라 사람이냐?’란 일갈이 유독 마음을 울리는 새해다.
류웅재 | 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일반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금 SNS에선]#남조선유우머 (0) | 2016.01.17 |
---|---|
[여적]계급 결혼 (0) | 2016.01.15 |
[로그인]늙은 386의 노래 (0) | 2016.01.14 |
[여적]은퇴자 출가 (0) | 2016.01.14 |
[시론]위안부 협상 , 어찌 화해일 수 있으랴 (1) | 2016.0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