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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로그인]늙은 386의 노래

opinionX 2016. 1. 14. 21:00

지난해 말에야 <1980년대, 변혁의 시간 전환의 기록-학출 활동가와 변혁운동>의 맨 뒷장인 720쪽을 덮었다. 두 달을 넘겨가면서 마지막 장까지 읽은 이유는 학생운동, 수배, 구속, 공장취업, 파업, 해고 등으로 점철됐던 ‘나의 20대’를 되돌아보기 위함이었다.

역시 나는 ‘386세대’로 이름 붙여진 1980년대 운동권의 삶과 한 치도 다르지 않게 살아왔음이 재확인됐다. 너무 많은 내가 있었음을 책 속에서 발견했기에 외롭지 않았다. 87년 민주화 항쟁으로 상징되는 민주화의 초석을 쌓는 데 한 점 기여를 한 것도 뿌듯했다.

그러나 당시 운동권 사이에 흔했던 “새로 세우려는 정부의 방향이 하룻밤 사이에 서너 번이나 바뀐다”는 농담처럼 한국사회에 대한 진단은 너무나 관념적이었다. ‘혁명이 곧 다가올 것처럼’ 오판하는 바람에 행동만 앞섰던 점도 다시 한번 반성했다. 노동운동 과정에 만났던 숱한 ‘전태일’들과의 연락이 끊어진 것은 진짜 아쉽고 아쉬웠다.

책을 읽는 동안 운동판에 헌신했던 선후배들, 동료들의 얼굴이 하나씩 떠올랐다. 공장 취업 며칠 만에 손가락이 모두 잘려 접합수술 이후 평생 장갑을 끼고 다니는 선배, 잇따른 해고 후 생활고 해결을 위해 석재공장에 취업했다가 먼저 세상을 뜬 선배, 직장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수십 차례나 취업·퇴사를 반복한 동료, 수사·수감 과정에서 허리디스크가 생긴 친구, 일자리를 찾지 못해 이제는 아예 일용직 노동자가 된 후배, 도시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시골로 떠난 선후배들….

운동권의 삶을 살았던 386들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평생 경제적으로 가난하게 살고 있다. 자신의 전공을 살리지 못했다는 더 큰 정신적 궁핍도 있다. 가장 많이 종사하는 업종이 학원강사·과외일 정도이니 현실의 삶은 항상 정신적 고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386세대는 1980년대에 이미 종지부를 찍은 셈이다.

그럼에도 한국에선 386세대가 현재까지도 역사의 큰 물줄기처럼 부풀려져 왔다. 결정적 책임은 정치권에 있다. 386세대를 이용해 흥행을 시도했던 정당들과 정치판 진출의 교두보로 활용했던 일부 정치인들 때문이다.

그들은 결코 386세대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거리에서, 공장에서, 감옥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청춘을 희생했던 절대 다수의 386세대는 평범하게 흩어져 살고 있는데 누가 무슨 자격으로 대표한다는 것인가. 그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이력과 배경을 바탕으로 정계에 진출한 정치인에 불과하다. 더 이상 386세대의 대표인 듯한 명함을 돌리지 말기 바란다.

386세대 운동권들은 아무리 현실이 고달프더라도 한 가지 ‘자부심’을 간직하고 있다. ‘세상을 바꿨다’는 것이다. 숱한 논쟁 속에 등장했던 세상은 아니더라도, 아직 꿈꿨던 세상은 오지 않았더라도 청춘을 바쳐 불합리한 세상에 대항했고 1987년을 정점으로 세상이 바뀌더라는 ‘달콤한 경험’을 맛본 것이다.


1987년 6월 15일 명동성당 앞 호헌 철폐 외치는 학생시위대_경향DB


그래서 이들은 지금도 상갓집에서, 송년회에서 마주칠 때마다 당시의 당당함을 잃지 않고 불합리한 현실을 토론하고, 20대 자녀들의 일상을 소재 삼아 이야기도 나눈다. 이제는 흰머리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난 386세대의 한 사람으로 2016년을 살아가는 청년세대들에게 전하고 싶다.

견고하게 굳어진 현실의 벽과 맞서는 것은 커다란 용기와 행동이 필요하고 결과에 따른 책임도 비례해서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당당하게 살았다는 자부심만은 평생 간직할 자격을 갖게 된다.

허위와 과장으로 덧씌워진 386세대를 당당히 비판해 달라. 대신 이 한 가지만은 인정하고 계승해 달라. 스스로 떨쳐 일어나 ‘세상을 바꿔보라’고. 모델이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과는 상극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산업화 모델은 자본 중심, 자본의 보조물로서 표준화된 노동력, 위계적 질서, 경쟁 등에 기초하고 있는 반면 21세기 사업 모델의 키워드들은 아이디어(사람), 차이(다양성, 개성), 협력, 공유 등이다. 애플의 앱스토어 사업, 우버, 에어비앤비 등은 제조업이나 서비스업도 아닌 아이디어 업종으로, 이들 21세기형 사업 및 기업들은 ‘협력의 경제’ 원리에서 작동한다. 차이와 다양성을 받아들이기보다는 개성을 죽이는 사회, 협력을 배척하고 무한경쟁만 요구하는 사회, 통제와 획일성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창의적 아이디어는 기대하기 어렵고 사회적 기술 개발은 불가능하다. 한국의 간판기업인 삼성전자가 제조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이다. 노동자의 희생과 검증된 선진기술의 빠른 학습에 익숙한 재벌 대기업의 신수종 사업 찾기가 성과를 내기 어려운 이유이다. 일본이 뒤늦게 장기불황의 해법을 산업체계의 전면 개편에서 찾고 90년대 후반부터 창조산업 육성을 했지만 처참히 실패했는데, 그 이유가 창조산업의 육성을 제조업식 사고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박근혜 정부는 일본의 ‘산업활력법’을 수입해 만든 이른바 ‘원샷법’으로 재벌 대기업의 사업체계 재편을 하겠다고 한다.

일본의 수출이 2007년 이후 하락한 이유가 강한 엔화 가치 때문이 아니라 일본 제품의 경쟁력이 없기 때문이라는 외신의 조롱(?)을 이들은 외면한다. ‘박근혜표’ 창조경제의 결과가 명약관화한 이유이다. 이처럼 절벽에 둘러싸인 한국경제는 노동력을 소모품으로 취급하고 무한경쟁만을 강요하는 ‘한국식 산업화’ 모델과 그 압축판인 재벌체제의 시효 만료를 의미한다. 청년들이 한국에서 못 살겠다고 떠나고 “붕괴 후 새로운 시작이 필요”하다고 절규하는 배경이다.


한대광 | 전국사회부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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