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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기고]생존자의 죄책감

opinionX 2014. 8. 4. 20:30

생존자의 죄책감(Survivor’s Guilt)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전쟁, 자연재해, 사고 등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겪게 되는 고통과 자책감을 의미한다. 재난이나 전쟁 등에서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동료나 친구, 가족들을 구하지 못하고 자신만 살아남은 데 대해 죄책감을 느끼게 되고 이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된다.

세월호 사고와 같이 사고현장에 같이 있었던 경우는 사고 당시에 물리적으로 손을 내밀어 위험에 빠진 동료나 친구를 구하지 못한 데 대한 죄책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살인사건이나 자살과 같이 가족이나 친구가 죽음을 맞이하는 현장에 같이 있지 않았던 사람들은 어떤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이들은 대부분 평상시에 위기에 빠진 사람(이하 위기자)이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에 충분히 ‘귀 기울이지 못한 것’을 자책하게 된다.

영화 <우아한 거짓말>을 보면 왕따로 자살한 학생(천지)과 그 가족들이 겪는 고통이 디테일하게 잘 묘사되어 있다. 극중에서 왕따로 고통받던 동생 천지는 언니(만지)에게 자신이 겪는 어려움을 이야기한다.

천지 : 언니 우리 반에 박미소라고 있는데, 따를 당하는데 이유를 모르겠어.

언니 : (등을 돌리고 누워서) 따를 당할 만하니까 당하겠지.

천지 : 언니는 친한 척하면서 뒤에서 욕하는 친구 없어?

언니 : 그런 애하고는 친구 하지마!

천지 : 만약 친구할 애가 그런 애밖에 없으면?

언니 : 그럼 혼자 다녀!

천지가 엄마에게도 이야기한다.

천지 : 엄마, 나 아파, 학교에 안 가면 안돼?

엄마 : (설거지를 하면서 뒤돌아보지 않고) 아파도 학교 가서 아파! 정 아프면 양호실에 가서 좀 누워 있어! 체육복은 맨날 잃어 버려….

천지는 자신의 어려운 상황을 가족들에게 이야기해 보려 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차갑고 매정한 반응뿐이었다.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의 가족들을 만나보면 자기 아들, 동생, 언니가 이렇게까지 어려워하고 고통받고 있었는지 몰랐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울 것 같은 가족들이 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 위기자의 고통에 대해 모르고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영화 '우아한 거짓말'의 한 장면 (출처 : 경향DB)


며칠 전 자신이 짝사랑하던 여교사를 살해한 죄로 35년형을 선고받은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통상적인 유기징역형에 비해 무거운 형이 선고되어 세간의 관심을 받고 있다. 이 사건의 가해자는 고등학교 재학시절 진학 상담 선생이던 피해자에게 연정을 느껴 집착하면서 3년간 스토킹하다 피해자가 다른 남자와 사귄다고 착각하고 무참히 살해했다.

그러나 피해자의 부모는 이런 사실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고 단지 ‘내가 상담하고 있는 아이가 특이하게 군다. 학교에서 압박이 있다’는 정도의 이야기만 딸에게서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딸이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도 ‘어린 친구고 앞날이 창창하니 좋게 해결하라. 네가 이해하라’고만 했다고 한다. 결국 피해자는 그렇게 오랫동안 살해 협박과 스토킹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어느 누구에게도 진정한 도움을 받지 못하고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피해자의 어머니는 경찰서에서 ‘내가 내 딸을 죽였다!’면서 흐느끼셨다고 한다. 그건 아마도 ‘딸의 이야기에 진정으로 귀 기울이지 않았고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딸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는 자책의 말이었을 것이다. 이렇듯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이들 뒤에 살아남은 자들이 공통적으로 자책하는 한 가지는 ‘그의 이야기에 진정으로 귀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가족, 친구, 동료라는 이름으로 매일같이 그들과 살을 맞대고 살아가고 있지만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건성으로 듣고 넘기거나 도움을 청하는 목소리에 핀잔과 야유, 훈계로 답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내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의 내면의 소리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지 살펴보려 하는 작은 노력들이 큰 불행을 막는 출발점이다.


황세웅 | 수원여대 교수·경찰청 위기협상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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