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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희문학제가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올해로 벌써 열아홉번째다. 홍명희는 한국 현대 역사소설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히는 <임꺽정>의 작가이다.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는 제1회 홍명희문학제가 1996년 청주 예술의전당에서 개최된 것이 어제 일 같다. 홍명희 생가 답사와 문학 심포지엄, SBS 드라마 <임꺽정> 시사회 등으로 다채롭게 진행되어 대성황을 이루었던 기억이 새롭다.
홍명희는 1888년 충북 괴산에서 명문 양반가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 홍범식은 한일합방 때 자결한 순국열사로 유명하다. 홍범식은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잃어진 나라를 기어이 되찾으라”는 유서를 아들에게 남겼다. 홍명희가 괴산에서 3·1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일제강점기 최대의 민족운동 단체 신간회의 지도자로 활동하다 감옥살이를 한 것은 부친의 유언을 따른 결과였다.
홍명희는 최남선, 이광수와 일본 유학시절부터 절친한 벗이었다. 세 사람은 ‘소년’지를 중심으로 신문학운동을 함께하면서 ‘조선의 세 천재’라 불렸다. 그후 홍명희는 조선일보에 10여년에 걸쳐 대하소설 <임꺽정>을 연재했다. <임꺽정>이 어찌나 인기가 있었던지 하루라도 연재가 중단되면 신문사에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고 한다. 홍명희는 <임꺽정>을 쓰면서 “‘조선 정조에 일관된 작품’ 이것이 나의 목표였습니다”라고 했다. 서양문학을 흉내 낸 소설이 아니라 우리의 민족 정서가 풍부히 담긴 소설을 쓰려 했다는 뜻이다. <임꺽정>은 출판되자마자 전 문단의 찬사를 받으며 우리 근대문학의 고전이라는 정평을 얻었다.
<임꺽정>은 홍명희가 월북한 후 금서가 됐다가, 1980년대부터 다시 출판돼 꾸준히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박종화, 황석영, 김훈 등 유명한 역사소설가들에게 <임꺽정>은 큰 영향을 끼쳤다. 지금까지 <임꺽정>을 논한 저서와 논문도 100종이 넘는다. 1998년 제3회 홍명희문학제 때는 각계 인사들의 모금으로 괴산에 문학비가 건립됐다. 홍범식과 홍명희의 생가도 2002년 문화재로 지정돼 새롭게 단장됐다.
충북 괴산군 제월리 벽초 홍명희 문학비 (출처 : 경향DB)
지난 18년 동안 홍명희문학제는 조촐하나마 내실있는 행사로 이어져왔다. 필자는 홍명희와 <임꺽정>을 전공한 국문학자로서 홍명희문학제에 참가할 적마다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다. 주최 측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임꺽정>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식지 않고 이어져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이념적인 이유로 홍명희문학제에 대한 시비가 일고 있다는 보도를 접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해방 후 홍명희는 중도우파 정당인 민주독립당 대표로 활동했다. 1948년 단독정부 수립을 막고자 김구·김규식과 함께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했다가 북에 남았다. 북한 정권 수립 후 홍명희는 부수상에 선임됐지만, 3인의 부수상 중 교육·문화 담당으로 실제 권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홍명희문학제는 정치인 홍명희가 아니라 작가 홍명희와 <임꺽정>의 문학적 가치를 기리는 순수한 문학행사다. 홍명희와 <임꺽정>에 대한 오해 위에서 문학제에 이념적인 덧칠을 하려는 행위는 중단되어야 한다.
강영주 | 상명대 교수·국어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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