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한국은 모든 것의 상품화가 가능한 사회로 전이되고 있는 듯하다. 무수한 사설학원들을 통해 교육의 상품화가 대중화된 지 오래다. 그뿐만 아니다. 이제는 하다 못해 철학, 언어, 역사, 법, 정치, 문학, 예술, 종교 등을 아우르는 인문학이라는 매우 복합적인 분야도, 단순한 일회용 상품으로 포장돼 곳곳에서 소비되고 있다. 최근 한 TV 프로그램의 ‘인문학 강좌’에서 최진기 강사가 ‘조선 미술사’에 대한 강의를 하던 중 자료에 오류가 드러나 사과문을 발표한 사건이 있었다. 자료에 오류가 있었다는 것은 어디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따로 있다. 최진기 강사에 따르면, 자신을 인문학 강사로 가장 많이 부르는 곳은 백화점과 기업이라고 한다. 사고팔 수 있는 상품으로 포장된 인문학이 가장 많이 소비되는 곳이, 이윤 확대의 가치를 최고의 목표로 내걸고 있는 전형인 백화점과 기업이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소위 ‘최진기 사건’은, 상품으로 소비되고 있는 인문학 열풍이 지닌 다층적 문제점들의 지극히 일부일 뿐이다.
‘최진기’라는 이름이 ‘인문학’이라는 표제어와 함께 곳곳에 등장하기에, 그가 나오는 방송을 찾아보았다. 그의 ‘인문학 강의’를 끝까지 듣는 것은 사실상 고도의 인내심이 요청되는 일이었다.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인문학의 상품화가 노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며, 또 다른 하나는 인문학이라는 복합적인 분야의 왜곡이 청중의 환호 속에 ‘자연스럽게’ 고착된다는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자 하는 ‘상품화의 욕구’에 의하여 유지된다. ‘인문학’이라는 바다와 같은 심오한 영역이, 미디어를 통해서 그 끝이 쉽게 드러나는 간편한 일회용 상품으로 포장되어 소비되고 있다. 인문학의 이름으로 인문학 정신을 배반하는 행위들이 대중매체를 통해서 퍼지는 것이다. 그런데, 인문학적 지식이란 특정한 분야의 정보를 외우고 나열하는 것으로 충족되지 않는다. 인문학적 ‘지식’은 인문학적 성찰의 세 가지 영역들이라고 할 수 있는 나, 타자, 그리고 이 세계에 대하여 복합적인 이해를 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관점을 형성하고, 자신의 관점을 가지고 다층적인 방식으로 이 세계에 개입하도록 하는 것이다. 단편적 ‘정보’와 인문학적 ‘지식’의 차이이다.
JTBC 토크쇼 <김제동의 톡투유-걱정 말아요 그대>에 출연하는 최진기 강사가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_경향DB
소위 인문학적 소양이란 치열한 ‘왜’로부터 출발한다. ‘왜’를 묻는다는 것은 비판적 사유와 분석을 필요로 한다. 근대를 지난 현대 인문학의 다양한 분야들을 아우르는 정신이 있다면, 그것은 ‘질문은 해답보다 심오하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인문학적 사유에 들어서는 사람들이 먼저 마주하게 되는 것은 간결함과 명쾌함이 아닌, 불확실성과 모호성이다. 인문학적 사유는 이전의 익숙한 이해세계를 뒤흔드는 내면적 불편함을 경험하게 한다. 한국의 대중매체에서 소비되고 있는 인문학의 상품화가 결정적으로 놓치고 있는 점이다.
‘어른들의 인문학’이라는 제목으로, ‘대한민국 최고의 인문학 종결자’라고 소개되는 강사를 통해서 전해지는 인문학은 갖가지 ‘해답’으로 이루어진다. 청중들에게 간결한 요약과 해답을 제시하면서, 그들을 즐겁게만 하는 인문학 강의는 듣는 이들을 오히려 인문학적 사유 방식으로부터 멀게 한다. 이 점이 바로 인문학 상품화를 통해서 소비되는 인문학 열풍의 위험성이다.‘인문학’이라는 분야가 이렇게 가볍게 상품화되어 소비되고 있는 것은 아마 이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현상인 것 같다. 한국 특유의 인문학 상품화를 통해서 한국에서의 인문학은, 밀란 쿤데라의 표현을 빌리자면,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포장되어 백화점의 강좌프로그램에서, 기업에서, 동회와 구청의 프로그램에서, 또한 출판시장과 방송에서 소비되고 있다. 이러한 집단적 ‘인문학의 상품화’를 통해서, 진정한 인문학적 정신은 근원적으로 외면되고 왜곡된다.
한국 사회의 인문학의 위기를 넘어서는 방식은 도처에서 남용되고 있는 ‘인문학’이라는 이름의 상품화를 통한 맹목적 대중화에 의해서가 아니다. 가정에서, 공교육에서, 기업에서, 정치에서 ‘왜’라는 물음표를 존중하고, 그 ‘왜’에 대한 잠정적 해답들의 모호성과 불확실성을 존중하면서, 치열하게 씨름하게 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기계적 암기가 전제되는 입시 중심 사회, 무차별적 성과와 순위를 매기는 성과 중심주의 사회, 요약과 명쾌한 해답에 열광하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인문학 열풍’은 오히려 ‘인문학의 소멸’을 가중시킬 뿐이다. 한국의 대중매체가 이윤 극대를 위한 ‘인문학 상품화의 유혹’에 맹목적으로 굴복하고 있는 현상이 위험한 이유이다.
강남순 | 미국 텍사스 크리스천 대학교·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교수
'일반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적]국정원과 사신(四神) (0) | 2016.06.15 |
---|---|
[이유미의 나무야 나무야]비비추 이야기 (0) | 2016.06.14 |
[사설]서울사립대학의 ‘문명사적 기로 선 대학’ 선언을 주목한다 (0) | 2016.06.14 |
[기자메모]혐오의 가림벽에 갇힌 성소수자들의 축제 (0) | 2016.06.13 |
[사설]3년 연속 최저등급 기록한 한국 노동자권리의 현실 (0) | 2016.06.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