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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칼럼

[기고]자수자강의 숙제

opinionX 2017. 8. 23. 11:08

분단 이후 한반도가 지니는 지정학적 의미는 강대국들 간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에서 특정 국가에 의한 한반도의 독점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과 북으로 분단된 한반도를 두고 미국과 중국이 펼치는 힘겨루기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14일 중국의 지식재산권 침해와 강제적인 기술이전 요구 등 부당한 무역관행을 조사토록 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사실상 무역전쟁을 선포한 셈이다.

중국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중국 상무부는 15일 대변인 성명을 통해 “다자간 무역 규칙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좌시하지 않겠다”며 세계무역기구(WTO)에 미국을 제소할 수 있음을 내비쳤다. 그러자 극우 성향의 스티브 배넌 전 백악관 수석전략가가 나서서 “중국과의 경제 전쟁은 모든 것이고, 우리는 모두 그에 미친 듯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미·중 패권 경쟁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한반도에서 그들이 (북핵 문제 등으로) 우리를 툭툭 치고 있지만 그건 단지 곁가지(sideshow)에 불과하다”고 했다.

7월 28일 오후 경북 성주 주한미군 사드 기지에 미군 장비가 놓여 있다. 이날 국방부는 사드 기지에서 진행해온 소규모 환경영향평가 이외 일반 환경영향평가도 실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연합뉴스

북한과 미국이 주고받은 ‘말폭탄’이 결국 ‘쇼’였던 것이다. 난공불락인 북한의 핵무기 위협 속에 살아남으려면 자수자강(自守自强)하는 수밖에 없다는 깊은 자괴감이 들었다. ‘어떻게’라는 물음에는 핵무기가 없는 한국의 전략적 딜레마가 숨겨져 있다. 풀기가 어려운 고난도 방정식과도 같다.

역대 어느 지도자도 자신에게 주어진 북핵 숙제를 풀지 못했다. 그 사이 북핵 문제는 점차 난도만 높아갔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밝힌 ‘레드라인’을 넘는 것도 시간문제라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그렇다면 문 대통령도 임기 내 북핵 문제를 불가역적으로 해결할 묘안이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임기 5년 단임제의 대통령이 세습으로까지 이어지는 왕조체제를 시간과의 싸움에서 이길 방법은 없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다시 말한다. 김정은 정권이 10~20년 이내 붕괴될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도 말자. 희망적 사고가 정책이, 국가전략이 될 수는 없다. 머지않아 김정은 정권이 붕괴될 것을 가정하고 보고서를 만들고 있다면 당장 중단하기를 권한다.

그렇다면 현명한 지도자가 해야 할 일은 주어진 여건을 최대한 활용하여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경로를 택하는 일이다. 어느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비핵화 벽돌을 한 장만 쌓는 일이다. 

‘가난한 국가’가 국가안보 수준을 단기간에 높이는 방법은 타국과 군사동맹을 맺는 것이 정설이다. 문재인 정부 역시 굳건한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북핵 문제 해결의 전기를 마련하겠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다.

다만 우려되는 점은 사드 배치 과정에서 확연하게 드러났듯이, 한·미동맹 강화 과정에서 중국의 크고 작은 반발에 문재인 정부가 얼마나 명민하게 대응할 수 있느냐이다. 이를테면 동북아 지역에서라도 미국에서 중국으로 급격하게 세력 전이가 이루어질 경우 우리의 내부적 균열을 어떻게 최소화할 것인가에 대한 전략적 고민도 함께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유럽의 동아시아 전문가였던 카를 필니가 19세기 말 미국 국무장관을 지낸 존 헤이의 “지중해는 과거의 바다이고, 대서양은 현재의 바다이며, 태평양은 미래의 바다”를 인용하면서 21세기는 중국이 세계 초강대국 역할을 맡는 다극화된 세기가 될 것이라고 예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병철 | 평화협력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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