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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은 수줍은 성격이다. 경남고 재학 시절 친구가 선생님에게 심하게 얻어맞아 입술이 터지고 피가 흘렀다. 부당한 폭력이었다. 문재인은 항의하고 싶었지만 나서지 못했다. 대신 문재인은 그 교사가 가르치는 과목을 공부하지 않았다. 전교 톱 수준의 성적이었지만 그 과목만 꼴찌였다. 이 때문에 그는 첫해 입시에서 서울대 상대에 낙방했다. 그게 문재인 스타일이다.

문 대통령은 한국 정치의 관행을 싫어한다. 중진 의원들도 그닥 신뢰하지 않는다. 기존 정치의 관행은 보스·계파정치요, 그 작동 방식은 밀실야합이었다. 2015년 문재인은 당 대표 시절 당이 계파가 아닌 시스템에 의해 운영되게 했다. 자기 사람이 잘려 나갈지라도 타협하지 않았다. 친노의 상징인 이해찬·문희상·유인태·정청래·김현이 공천에서 탈락했지만 손을 내밀지 않았다. 과거 여의도 정치의 문법으로는 서로의 지분을 보장하며 나눠먹는 것이었지만 문재인은 거래에 나서지 않았다. 다선 의원들은 지분이 사라지고 정치적 기반이 흔들리자 “친노가 다 해먹는다” “근본도 없는 놈들이 당을 말아먹고 있다”고 했다. 친문 패권주의란 말이 나왔다. 문재인에겐 ‘정치력 부재’ ‘리더십 부족’이란 꼬리표를 붙였다. 원칙에 반하는 타협을 거부한 결과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경남고등학교 재학 시절 소풍 때(뒷줄 가운데) 찍은 사진. 문재인 캠프 제공

결국 그들은 탈당했다. 당을 떼로 뛰쳐나간 의원들은 동교동계를 중심으로 한 호남 중진들이었다. 문재인 캠프의 핵심 인사는 “문 대통령이 제일 싫어하는 게 여의도 중진정치다. 갑자기 중진들이 한소리하며 ‘옛날엔 어쨌는데…’라고 충고하는 거를 싫어한다. 기존 여의도 정치에 대한 혐오감이 있다”고 했다. 참여정부 민정수석 시절 2004년 총선 출마 요청을 거부하자 당에서 “왕수석 노릇을 계속하고 싶은 모양”이란 말이 나왔다. 뒤도 안 돌아보고 민정수석을 그만두고 청와대를 떠났던 그다.

출범 100일이 갓 지난 문재인 정부의 본격적인 국정운영은 지금부터다. 100대 국정과제를 이행하기 위해서는 465건에 이르는 법률 제·개정이 필요하다. 120석 여당만으로는 실현할 수 없는 구도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야당의 협조, 즉 협치 구도를 만드는 데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문한다. 언즉시야(言則是也), 맞는 말이지만 문 대통령의 생각과는 좀 다르다. 

민주당은 지난 7월 임시국회에서 뿌리가 같은 국민의당의 협조를 먼저 견인하고 여기에 바른정당을 합류시켜 비(非)자유한국당 전선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실은 호남의 사나워진 민심과 문재인 정부 지지 여론이 크게 작용한 덕분이다. 9월 정기국회도 신(新)3당공조가 이뤄질지는 의문이다. 국민의당은 8·27 전당대회에서 안철수 전 대표가 새로운 당 대표로 선출될 것이다. 안 전 대표는 출마선언에서 “북핵 위기, 부동산 폭등, 불안정한 에너지 정책 같은 문제를 두고는 분명한 역할을 하는 야당이 되겠다”고 했다. 몇 가지를 예로 들었지만 문재인 정부 정책 전부를 놓고 하는 말과 다를 바 없다. 안철수가 주창한 ‘극중주의’란 문재인 정부 개혁과제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유인태 전 정무수석은 “문 대통령은 지난 100일간 야당을 설득하는 데 온 정성을 쏟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관찰은 정확하지만, 왜 그랬을까에 대한 답은 빠져 있다. 답은 문 대통령이 여의도 정치 문법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협치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한다. 하지만 어떤 협치인가라는 문제가 남는다. 문 대통령은 비겁한 협치, 야합식 협치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찾은 게 시민을 향한 직접 소통이다. 문 대통령은 취임 후 대국민 소통 행보에 주력하고 있다. 양김(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은 권위주의적 카리스마 정치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계몽군주처럼 담론을 선도하는 정치를 펼치다 고립됐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불통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문 대통령의 감성적 소통정치는 한국 정치사에 이제껏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새로운 시도다. 문 대통령은 그제 대국민보고에서 “간접민주주의로 우리 정치가 이렇게 낙후됐다. 문재인 정부는 국민들의 집단지성과 함께 나가는 것이 성공의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의 의중은 명확하다. 여의도가 구체제, 낡은 정치에 찌들어 있는 한 협치를 구걸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위험한 생각일 수도 있고, 파천황(破天荒)적 정치실험일 수도 있다. 고교 시절엔 마음에 안 드는 교사의 책을 덮는 식으로 맞설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은 국정을 덮을 수 없다. 문 대통령의 새로운 실험은 성공할 수 있을까. 9월 정기국회에서 성적표가 나올 것이다.

박래용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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