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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판사들의 학술활동에 대한 부당 견제와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과 관련해 전국의 상당수 법원에서 판사회의가 열렸다. 판사들은 책임규명과 의혹해소 등 후속조치, 사법부 제도개선을 논의하기 위해 ‘전국법관대표회의’를 열라고 결의했다.

결국 지난 17일 양승태 대법원장은 “전국 법관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 각급 법원에서 선정된 법관들이 함께 모여 현안과 관련해 제기된 문제점과 개선책을 진술하고 심도 있게 토론하고 의견을 모을 수 있는 논의의 장을 마련하고자 한다”면서 “법원행정처도 필요한 범위에서 이를 최대한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현직 부장판사 기고]전국법관대표회의는 왜 필요한가(온라인용 긴 글)

현재 우리 사법부에는 자율적인 전국 단위 판사 회의체가 없다. 이는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다. 판사회의는 1993년 사법제도개혁의 하나로 법원조직법에 근거 조항이 신설됐다. 하지만 각급 법원에 설치되는 판사회의는 사법행정에 관한 ‘자문기관’으로 그 권한은 ‘자문’에 불과하다. 판사회의 의장도 법원장이라고 대법원이 규칙으로 정했다.

지난해에야 법원행정처가 전국 단위의 정기 회의체라며 ‘사법행정위원회’를 만들었다. 하지만 위원은 고등법원장이 추천하고 법원행정처장이 위촉하는 법관이고, 위원장도 위원 가운데 법원행정처장이 지명한다. 사실 사법행정에 관해 헌법은 108조에서 대법원의 규칙 제정권을 규정한 게 전부다. 하위 법률인 법원조직법 9조에서 사법행정권을 대법원장에게 주었다.

양승태 대법원장 (출처: 경향신문 DB)

양승태 대법원장 (출처: 경향신문 DB)

미국과 독일 등 사법 선진국은 다르다. 일선 판사들이 사법행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일선 판사들의 참여를 배제하고 수직적인 관료시스템에 종속시켜서는 재판의 독립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은 지방법원 판사들의 투표로 선출되는 대표가 참여하는 연방사법회의가 사법행정의 최고결정기구다. 독일에서는 자율적인 전국적 연합단체인 독일법관협회가 사법행정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독일의 각급 법원에서도 선출된 판사들로 구성되는 각종 위원회가 사법행정에 관여한다.

우리나라는 일선 판사의 사법행정 참여가 봉쇄돼 있을 뿐 아니라 금기시된다. 혹자는 대법원장과 대법관은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 임명하므로 사법부에서 유일하게 민주적 정당성을 가지고, 따라서 사법행정권한은 대법원장과 대법관회의만이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선 판사들이 사법행정에 관해 의견을 제시하면 밥그릇 싸움으로 매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법행정에 관해 일선 판사들이 자율적인 전국 회의체를 통해 의견을 수렴하는 것이야말로 사법정책 결정의 민주적 정당성을 담보한다. 이를 통해 각종 사법제도의 장단점과 문제점이 드러나고 실질적인 논의가 이루어진다. 언론 등을 통해 내용이 공개되면서 국민들의 사법행정에 대한 참여와 숙의도 가능해진다.

사법행정과 같은 전문적이고 폐쇄적인 관료영역에서 당사자의 내부 통제를 매개로 하지 않으면 국민들의 의사는 좀처럼 형성되기도 반영되기도 어렵다. 대법원장의 권한도 일선 판사들의 자율적인 전국 회의체의 견제를 받도록 수평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사법 독립의 측면에서 바람직하다.

현재와 같이 일선 판사들에 의한 내부 통제조차 받지 않을 경우 대법원장이나 법원행정처는 오히려 밀실 속에서 정부나 의회 등 타 국가기관의 압력으로부터 취약해지고, 이러한 압력은 개별 판사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게 될 것이다.

새 정부 출범을 전후하여 사법부 개혁에 대한 논의도 조금씩 나오고 있다. 제왕적 대법원장 권한의 제한과 법원행정처의 권한 축소도 중요한 주제다. 그럼에도 ‘전국법관대표회의’ 등 판사들의 자율적인 전국 단위 회의체의 제도화·상설화가 그 방안의 하나로 논의되지 않는 것은 일선 판사의 입장에서는 안타깝기만 하다.

사법권력 또한 궁극적으로는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민들께 보다 민주적이고 신뢰받는 사법부를 위하여 사법행정에도 관심을 기울여주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부탁드린다.

김예영 전주지방법원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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