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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에 숫자들이 걸린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한 달 안에 집무실에 두겠다고 한 ‘일자리 상황판’이다. 취업률, 비정규직, 근로시간, 임금 불평등, 경제성장률, 재정수지…. 상황판엔 고용·성장지표와 새 정부의 중점관리지표가 들어갈 것으로 예시됐다. 대통령이 챙기는 숫자와 그래프는 힘이 있다. 청와대 수석이나 장관들은 주·월·분기 단위로 새로 달릴 숫자에 신경이 곤두설 테다. 이 상황판 위나 옆에 걸 ‘다급한 숫자’가 있다. 지난달 5172만2903명을 찍은 인구다.
내리막 그래프는 브레이크가 풀렸고, 숫자는 배드뉴스뿐이다. 여성 한 명이 평생 낳는 아이를 지칭한 합계출산율은 세번째 변곡점을 맞고 있다. 1983년 2.06으로 인구의 현상 유지선(2.1)이 무너졌고, 2001년 초저출산 사회 잣대인 1.3 아래로 떨어졌다. 올핸 15년째 버틴 한 해 출생아 수 40만명선도 무너질 판이다. 지난해 40만6300명에 턱걸이한 출생아 수는 올 1~2월 11.8%나 더 떨어졌다. 보건당국에 물어봤다. 고비는 더 많다. 지난해 3736만명의 정점을 찍은 생산가능인구(15~64세)는 올해부터 줄어든다. 내년엔 노인이 14%가 넘는 고령사회가 된다. 2022년이면 ‘응아~’ 소리가 40만명대로 처음 내려선 2002년생들이 군대의 축이 되고, 현재 54~62세인 1차 베이비부머들도 은퇴한다. 한 세대 만에 출생아가 절반 줄어든 여파가 문 대통령 집권 5년간 격렬히 표출되는 셈이다.
지금도 인구는 늘고 있다. 수명이 길어진 덕이다. 지난해 10월 65세 이상 노인이 14세 이하 어린이를 추월하는 ‘실버크로스’가 일어났다. 7개월 만인 올해 어린이날 이 차이는 27만명까지 벌어졌다. 데워지는 물속에서 뛰쳐나가지 않는 개구리처럼 초고속으로 늙어가는 나라가 된 것이다. 그나마 인구 자연증가 그래프는 2031년 5296만명을 찍고 꺾여 2065년 3000만명대로 줄 거라는 잿빛 전망이 걸려 있다. 미국과 유럽이 탈출구로 삼은 이민도 벽에 부딪혔다. 한국에 시집 온 외국여성은 2010년 2만6300명에서 5년 만에 1만4000명으로 줄었다. 농촌 총각이 줄고, 조선족도 고령화되고, 베트남 젊은 여성은 활기찬 중국 도시로 가고 있다.
인구는 요술방망이가 될 게다. 4인 가구에 맞춘 패밀리레스토랑·자동차·아파트의 주 고객은 바뀌고 있다. 1~2인 가구 폭증세는 통계당국의 2025년 예상치 60%도 앞당길 수 있다. 1970년 57만명이던 초등학교 입학생은 지난해 26만명으로 줄고, 존폐 기로에 처한 시·군·구만 83곳이다. 정년 연장 시점과 폭을 두고 출생아 100만명이 넘는 ‘58년 개띠’와 ‘70년 개띠’는 얼굴을 붉히고 있다. 노·장·청 간 국민연금 기싸움도 예열되고 있다. 모두 인구가 빚어낸 변화와 내전이다.
인구는 어김없다. 사회·경제·삶 만족도의 총체적 결과물이 출산율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먹이 많고 안전한 곳에 번식지를 찾는 동물의 세계와 다를 바 없다. 뒤집어보면, 물레방아를 세우거나 역회전시키는 것만큼 반등이 어렵다는 뜻이다. 한국의 인구는 구조적 악순환기에 접어들었다. 1차 베이비부머 자녀인 에코붐세대(1979~1983년생)가 첫째아이 평균 출산연령(31.4세)을 넘었다. 인구전문가들이 그나마 2012~2014년 출생아 47만명 시대를 버텨줬다고 보는 세대다.
시간과도 싸우는 ‘인구 골든타임’은 늦었고, 남았어도 길지 않다. 애국심에 호소하고, 가임여성 출산지도나 만드는 박근혜식 리더십은 길을 잃었다. 조직 리더에게 IQ(지능지수)·EQ(감정지수)·NQ(공존지수)를 넘어 FQ(여성지수)의 품성을 요구하는 시대다. 그래도 양성평등의 FQ는 출발선일 뿐이다. 출산-슈퍼맘-경력단절-황혼육아의 버거운 ‘맘고리즘’ 고리를 끊어줄 때에야, 제도·예산으로 보여줄 때에야, 내 아이도 행복할 거라는 믿음이 생길 때에야, 혼인·출산율은 적어도 추락을 멈출 수 있다.
일본 아베 정부가 ‘1억총활약상’이라는 장관급 기구를 만든 게 2015년 10월이다. ‘잃어버린 20년’의 저성장과 저출산이 악순환했다는 반성 끝에 인구 1억 사수에 나선 것이다. 대한민국에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화위원회가 출범한 것은 2005년 합계출산률이 최저점(1.08)을 찍은 해다. 그로부터 12년, 잊을 만하면 열리고 산발적으로 쏟아부은 저출산 예산 81조원은 흔적도 없다. 교학사 파동 후 2015년 11월 부활시킨 교육(사회)부총리는 누리과정 예산을 지방에 떠넘기고, 국정교과서만 밀어붙이다 끝났다. 대한민국엔 인구 정책을 총괄·지휘·집행하는 힘 있는 상설기구가 없다. 문 대통령의 취임사엔 ‘인구’ 얘기가 없었다. 5년 후엔 저출산의 덫을 풀고 처음으로 반전된 인구 숫자를 담은 퇴임사를 볼 수 있을까. 대선 TV토론에선 아무도 말하지 않은 희망의 근거, 이제 ‘인구 대통령’이다.
이기수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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