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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9월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유엔의 노벨상’으로도 알려진 난센상을 시상한다. 난센상은 1954년 노르웨이 탐험가이자 난민구호에 열정을 바쳤던 프리트요프 난센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이래 난민구호에 헌신적 사랑과 특별한 용기를 보인 사람들에게 수여해 왔다.

올해 난센상 최종 후보로 올랐던 한국인 전제용 선장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는 1985년 11월14일 운명적인 상황과 마주쳤다. 인도양에서 참치조업을 끝내고 한국으로 귀항하던 중 남중국 공해 상에서 필사적인 구조를 요청하는 작은 목선을 발견했다. 베트남 보트피플이었다. 당시 월남 패망으로 수많은 난민들이 남중국해로 탈출했으나 항해하던 선박들은 이들을 외면했다. 전 선장도 무심코 지나쳤다. 더욱이 본사는 물론 당국에서도 구조하지 말라는 지시가 빗발쳤고, 선원들 의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전 선장은 생사의 기로에 서있는 피난민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동료 선원을 설득해 회항을 지시하고, 이들을 구출했다. 어린아이와 임산부를 포함해 96명이었다. 식량과 식수를 공유하면서 어렵게 부산항에 도착했으나 냉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당국에 불려가 혹독한 조사를 받았고 선장 면허까지 정지됐다. 구조한 난민과의 접촉도 불허됐다. 졸지에 실업자 신세가 되면서, 생계유지를 위해 부인과 궂은일을 해야 했다. 그는 이런 고초 속에서도 자신의 결단을 후회한 적이 없었다.

구조된 난민들은 부산적십자난민보호소에서 대기하다가 미국, 캐나다, 호주 등으로 이주했다. 그 후 이 사건은 거의 20년간 잊혀졌다. 난민들은 재정착에 시간을 보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난민 중의 한 사람이었던 피터 응엔이 2004년 8월 전제용 선장을 자신이 정착한 미국 캘리포니아로 초청했다. 그는 해상구조 당시를 소회한 <바다의 온정>(The Ocean’s Heart)이란 책도 내면서 생명의 은인과의 재회를 잊은 적이 없었다.

환영 행사장에 운집한 보트피플과 베트남계 미국인들은 전 선장에게 뜨거운 눈물과 함께 박수 갈채를 쏟아냈다. “누구도 못할 일을 전 선장과 선원들의 용기 있는 결단으로 우리를 살렸다”고 감격에 겨워했다. 정작 전 선장은 “할 일을 했을 뿐이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리틀 사이공’으로 알려진 캘리포니아의 베트남 커뮤니티는 침몰직전의 목선과 사투를 벌이던 보트피플을 구한 전제용 선장을 유엔 난센상 후보로 추천했다. 우리 정부와 국회는 물론 미국 의회 의원들도 성원을 보냈다.

1985년 표류중인 베트남 난민을 구해 2009년 국회인권포럼 인권상을 수상한 전제용씨 (출처 : 경향DB)


최근 해상난민 문제가 국제사회에서 다시 부각되고 있다. 중동과 북아프리카 등 분쟁지역을 피해 바다로 탈출하는 난민들이 부쩍 증가하는 반면 해상에서의 안전은 취약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해상난민 문제는 유엔 난민구제고등판무관(UNHCR)이 금년도 특별 토의주제로 선정할 만큼 심각하다.

우리는 한국전쟁 중에 보여준 레오나르 라뤼 선장의 용기와 박애정신을 기억한다. 그는 1950년 말 혹독한 추위 속에 흥남부두에 운집한 피란민 1만4000여명을 거제까지 수송했다. 보다 많은 승선을 위해 메레디스 빅토리호의 방어용 무기까지 모두 바다에 버렸다. 3일 간의 항해 중 단 한건의 사상자도 없었고 오히려 5명의 새 생명이 태어났다.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도 불리는 이 항해는 한 척의 선박으로 가장 많은 난민을 구조한 해상 작전으로 기네스북에도 올라 있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의 참담함을 겪으면서 기본적 책무도 저버린 선장과 선원들의 무책임과 비정함에 분노했다. 전제용 선장이 난센상 수상자로 최종 선정되지 못한 것은 애석한 일이다. 그러나 그의 숭고한 박애정신과 용기 있는 결단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이다. 그는 진정한 사랑을 실천한 의인이었고, 이 시대 우리들의 평범한 영웅이다.


최석영 | 주제네바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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