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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서울시가 청계천·을지로 지역 재개발에 대한 대책을 발표했다. 재정비사업을 재생사업으로 전환하겠다고 한다. 세운재정비촉진사업은 다수 상인들의 고통을 담보로 시행사만 이득을 보는 잘못된 사업이었기 때문에, 공공성을 위해 방향을 전환하는 것은 당연하다. 심지어 오랫동안 일해온 세입자들만이 아니라 우리와 오랜 시간을 함께해온 건물주조차도 원하지 않는 사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잘못됐다면 이미 행정 절차가 진행됐더라도 당장 멈추고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지금의 대책은 말 그대로 방향 전환일 뿐이고, 주상복합아파트를 짓는 개발사업이 그대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산업생태계 활성화에 대한 구체적 방안 없이, 철거되는 업체들을 인근의 대체부지로 이주시킨다고 한다. 심지어 재개발구역 해제로 인해 발생할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방지책도 없다. 이렇게만 보면 결국 주상복합아파트를 짓고 주변 지역은 민간에서 알아서 개발하게끔 두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청계천·을지로에 대규모 아파트 건설을 허용하고 남은 비좁은 땅에 아파트식 공장을 짓는다면 과연 산업생태계가 유지될 수 있을까? 우리는 대체부지를 요구한 것이 아니라 현 골목의 구조를 최대한 유지하는 리모델링형 도시재생 사업을 통해 산업생태계를 살리고자 했다. 한발 물러나 재개발을 인정하고 대체부지를 받아들인다고 한들, 산업생태계 활성화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 없는 한 우리에게 대체부지는 의미 없다.
청계천·을지로 일대는 오랜 협업관계로 이루어진 제조 특화 지역이다. 짧게는 30년, 길게는 60년 동안 이 지역에서 거래를 하면서 축적된 유통 경로와 신뢰 관계가 지금의 협업체계를 형성했다. 정밀 가공을 중추로 해서 공구, 철물, 기계부품, 조명, 귀금속, 시계, 인쇄, 전자부품 등 여러 제조·유통 업종들이 서로 긴밀하게 맞물려 시장을 이끌어왔다. 이렇게 특화된 점포 하나하나가 특수한 기능을 하기 때문에, 한 점포만 사라져도 지역의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서울시는 산업생태계의 구조도 이해 못한 채로 우선 이주부터 하라고 한다.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의 팔과 다리를 잘라서 다른 곳에 붙이면 제대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가든파이브 사태가 반복될까 우려된다.
이곳은 제조업 르네상스의 발상지다. 청계천·을지로 일대의 산업생태계는 맞춤형 소량 생산에 특화되어 있고, 자원과 정보의 유통과 접근이 용이한 도심 한가운데에 있다. 그래서 기업 및 공공 연구소, 학교 연구실, 창업가, 예술가 등 창의적인 생산활동을 하는 곳에서 많이 이용한다. 이 같은 산업생태계가 파괴되면 제조업만이 아니라 우리의 생산활동 전체를 떠받치고 있던 토대가 무너진다.
아직 늦지 않았다. 방향 전환의 용기를 보여준 만큼, 서울시가 상인들과 지역 시민단체와 함께 산업생태계 활성화를 위한 고민과 연구를 진지하게 하길 바란다. 재개발로부터 산업생태계와 상인들의 삶의 터전을 지킬 수 있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방안 마련은 지역 주체인 상인들과 머리를 맞댈 때에만 가능하다. 도시 제조업의 미래를 위해 서울시는 이 점을 기억해야 한다.
<조무호 | 청계천생존권사수비상대책위원회 정밀지구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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