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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미국을 제외한 모든 대통령제는 공간을 초월하여 대통령 1인에게 권력을 집중한다. 미국 대통령제마저도 연방헌법상으론 연방제-양원제와 조합된 수평적·수직적 권력분점형이지만, 역사학자 슐레진저와 스탠퍼드 교수 후쿠야마에 따르면 실제론 견제-균형 원리보다는 제왕적 대통령제로 작동하며 정치적 양극화를 고착화한다.

청와대 발의 개헌안도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대통령-국회-사법부 권력관계를 일부 재조정했지만, 총리(내각)·사법부·권력기관 인사권 등 대통령 권력을 별반 손질하지 않았다는 게 헌법학자들의 중론이다. 사실상 제왕적 대통령제를 8년으로 연장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설령 비례제와 대선 결선투표제를 도입해도, 8년 제왕적 대통령 권력을 쟁취하려는 진보블록-보수블록이 일상적으로 대척하는 ‘양극적 다당체제’(bipolar pluralism)로 인해 대통령-국회 관계는 순탄치 않을 것이다. 정녕 제왕적 대통령으로 출발하여 ‘식물대통령’으로 끝나는 역설적인 악순환이 재현될지 모른다.

청와대 설명이다. 대통령제 국가에서 국회 총리 추천·선출제는 변형된 의원내각제 혹은 분권형 대통령제이고, 대통령제와 배치되며, 대통령과 총리의 소속정당이 다른 경우 대통령-총리, 대통령-국회 충돌로 국정마비 사태가 야기될 수 있다는 것. 고전적인 정부형태론적 관점에서 보면 올바른 통찰이고, 권력구조 연구들이 우려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일부 국가들의 제왕적 대통령제는 다당체제 속에서 ‘대통령제의 의원내각제화’, 곧 연립정부형 대통령제로 진화하여 대통령-의회 협치를 순항시키고 있다. 그렇기에 청와대 논리와는 달리 국회 총리 추천제는 오히려 청와대 중심의 폐쇄적 국정운영 회로를, 국회-내각-대통령을 유기적으로 가교시키는 공치(co-governing, 공동 국정운영) 시스템으로 바꾸는 연결고리이다. 공치 시스템의 정상화는 국회의 정당연합을 전제하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핀란드는 외교안보와 군사상 대국인 소련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국가의 생존전략을 세워야 하는 지정학적 숙명의 길을 걸었다. 국가적인 리스크에 대응하는 핀란드의 전략적 처방은 분권형 대통령제였다. 즉 외교안보에 국가정책의 우선순위를 두고, 외치(외교·국방·안보)를 전담하는 대통령과 의회 선출에 책임을 지며 내치(경제·사회·복지·교육)를 주도하는 총리(내각)로 구성되는 분권의 정부제도다.

소련 해체와 EU 가입에 따라 개정된 핀란드 신헌법은 대통령-총리 간 대외정책 결정권의 분점·공유를 헌법적으로 제도화했다. 이런 핀란드 분권형 대통령제는 프랑스 ‘대통령 우위’ 혹은 오스트리아 ‘총리 우위’ 분권형 대통령제와 차별화된 합의제 헌정체제의 제도적 중심축으로서 외교안보-경제민주화-복지국가-국민통합의 정치적 인프라로 작동한다. 핀란드 경험은 4강 패권경쟁 속에서 남북비핵평화·연합·통합-경제민주화-복지국가 대장정을 추동해야 하는 우리의 헌정공학에 의미심장한 벤치마킹 모델이 아닐 수 없다.

분권형 대통령제는 통상 비례제가 유인하는 정당 경쟁·연정 사이클과 긴밀하게 맞물릴 때 안정적으로 작동한다. 탈공산주의 폴란드의 분권형 대통령제는 다당연정과 연계해 민주화 이행을 넘어 민주주의를 공고화했다. 이념블록 경계를 넘나드는 핀란드 정당연합 정치는 대통령-총리-내각-의회 간 수평적 권력분점과 조응하며 외교·EU 정책·입법 과정을 조정한다. 연정이 제도화되지 않는 다수제 국가 프랑스를 제외한 어느 국가에서도 분권형 대통령제의 아킬레스건으로 회자되는 내치·외치 경계 모호성, 소속정당이 다른 대통령-총리 간 충돌로 국정교착과 헌정위기는 발생하지 않았다. 

대수술을 기다리는 제왕적 대통령제, ‘진통제’로는 다스릴 수 없다. 권력구조를 바라보는 청와대의 사고가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정치란 정책·입법 의제의 스몰딜, 빅딜, 패키지딜의 궤적이다. 청와대·민주당이 한국당과 ‘분권형대통령제-연동형비례제’를 맞교환하는 빅딜을 결행할 때 개헌정국 출구는 열릴 수 있다. 혁명이 성공하려면 혁명 하려는 주체세력이 스스로를 혁명해야 한다. ‘나라다운 나라’를 절규했던 촛불혁명에 정체성을 둔 청와대의 혁명적인 통 큰 결단이 긴요한 시점이다.

<선학태 | 전 전남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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