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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기고]퀸과 한국 사회

opinionX 2019. 1. 8. 11:18

중학생 시절, 한 친구의 집에는 당시 중산층 가정에서는 볼 수 없던 소니 VCR이나 워크맨, 고급 전축이 갖춰져 있었다. 친구는 이들 기기를 통해 최신의 콘텐츠들을 향유했는데, 주로 해외 영화와 록이나 헤비메탈 등의 팝송, 특히 다양한 이유로 금지곡으로 지정된 음악들이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곡은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였다. 

작년 한해 우리 대중문화계에는 굵직한 이슈들이 많았다. 방탄소년단(BTS)의 빌보드차트 1위 수상을 포함한 전 지구적인 인기, 남북 예술단의 평양과 서울 공연, 미투운동 등이 그중 일부이다. 이와 더불어 영화 한편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우리 문화계에 조용한 파문을 일으켰다. 그것은 바로 <보헤미안 랩소디>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된 록밴드 퀸의 일대기였다. 특히 그룹의 리더였던 프레디 머큐리의 삶을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다룬 이 영화는 한동안 대중의 기억에서 사라진 뮤지션을 대중문화의 전면으로 불러내었다. 

제76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록밴드 ‘퀸’의 메인 보컬 프레디 머큐리 역을 맡아 남우 주연상을 수상한 배우 라미 말렉(가운데)이 ‘퀸’의 실제 멤버인 브라이언 메이(왼쪽, 기타), 로저 테일러(오른쪽, 드럼)와 함께 백스테이지에서 수상의 기쁨을 나누고 있다. 로이터 _ 연합뉴스

과거의 아티스트와 음악이 영화를 통해 재해석되고 재구성된 사례는 이전에도 있었다. 일례로 요절한 미국의 로큰롤 가수 리치 밸런스의 짧은 생애와 음악을 다룬 영화 <라밤바>나 아바의 동명의 곡을 소재로 한 <맘마미아> 등이 그랬다. 다만 퀸 열풍은 이들과는 유사하면서도 상이한 면을 보여준다. 우선 이전의 영화들이 전 지구적으로 큰 인기를 구가했던 것과 달리, <보헤미안 랩소디>는 퀸의 본고장 영국에서보다 한국에서 더 높은 누적 매출액을 기록하며 전 세계에서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큰 흥행을 기록했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이는 단순히 스타의 탄생과 몰락이라는 클리셰를 활용해 한 인간의 굴곡진 삶을 그린 드라마적 감동이나 음악적 완성도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물론 퀸은 30년이 지난 지금 들어도 전혀 올드하지 않고 매우 현대적이고 세련된, 시대를 앞서간 아티스트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70~80년대는 퀸만큼이나 뛰어난 록 그룹과 아티스트들이 군웅할거한 시절이기도 했다. 가령 시카고와 이글스, 스모키와 에어서플라이 등 기라성 같은 그룹이 활동했고 이들과는 결이 다르지만 칼리지 록(College Rock)이라는 장르를 만들어낸 REM, 일리노이대학 재학생들이 주축이 된 REO Speedwagon 등도 국내외에서 견고한 팬덤을 형성하고 있었다. 다만 퀸 현상은 동아프리카의 잔지바르에서 태어난 페르시아계 인도인이었던 프레디 머큐리가 주류 영국사회의 냉소를 실력과 노력으로 이겨낸 감동적 휴먼스토리, 또한 단순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그의 양성애자로서의 사생활과 불우한 말년 등 극적인 삶에 대중의 동일시와 공감이 확장된 지점에서 생성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영화 속 “우리는 모두 아웃사이더들이고 세상의 모든 아웃사이더들을 위해 노래하죠. 마음이 쉴 곳 없는 세상에서 외면받은 사람들을 위해서. 퀸은 바로 그들을 위해 존재합니다”라는 프레디의 대사에서 함축적으로 드러난다. 공항에서 수하물 노동자로 일하며 음악에의 꿈을 키우던 이민자 출신의 아웃사이더 파록버사라(프레디의 본명)의 삶은 24세 비정규직 노동자가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목숨을 잃는 일이 그리 특별하지 않게 일어나는 한국사회에서 청년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줬을까. 오늘날 다수의 청년들은 결혼과 출산, 내집 마련의 꿈조차 꿀 수 없고, 자본과 정보, AI와 네트워크가 많은 것들을 대체하는 생존주의의 차가운 삶과 사회의 작동방식에 무방비로 내던져졌다. 영화는 이렇듯 헬조선을 살아가는 젊은 세대에게 자기 연민과 공감, 다른 삶과 사회에 대한 상상의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가 우리 사회에 주는 함의는 아프고도 무겁다.

<류웅재 한양대학교 교수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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