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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여적]수평적 호칭

opinionX 2019. 1. 9. 10:29

트로이전쟁 후 귀향길에 나선 오디세우스는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가 사는 동굴에 갇힌다. 거인에게 잡아먹힐 위험에 처하자 오디세우스는 불에 달군 말뚝으로 거인의 눈을 찔렀다. 누구냐고 소리치는 거인에게 오디세우스는 ‘우티스’(Outis)라고 말했다. 비명을 듣고 달려온 거인의 친구들이 누구의 소행이냐고 묻자, ‘우티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친구들은 “아무도 안 찔렀다니 어쩔 수 없네”라며 돌아가버렸다. ‘우티스’는 ‘아무도 아닌 자(Nobody)’라는 뜻. 오디세우스는 자신을 ‘우티스’라고 호명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했다.

압록강을 건넌 연암 박지원이 요동에 묵을 때의 일이다. 이슥한 밤,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 “거 누구냐”고 소리 지르니, 청나라 순찰병이 “도이노음(島夷老音)이오”라고 대답한다. 연암은 그 말이 “되놈”임을 알아차렸다. 그러면서 청나라 사람들이 ‘되놈’이 자신들을 낮춰 부르는 호칭인 줄 모르고 아무렇지 않게 쓰는 것을 보고서 포복절도한다.

어떻게 부르고, 불리느냐가 존재를 규정한다. 신분을 규정하고, 때로는 오디세우스처럼 생사를 가른다. 호명은 호칭을 통한 관계 맺기이다. 호칭은 상대방을 인정하는 동시에 구별짓는다. 그것은 서열과 연령, 친밀감, 격식에 따라 다르다. 한국 사회가 특히 심하다. 처한 위치와 부부관계에 따라 아내 호칭은 여보, 당신, 아무개 아빠, 자기 등으로 갈린다. 상대에게 말하는 아내 호칭도 아내, 마누라, 와이프, 안사람, 내자 등으로 달라질 수 있다. 직장, 학교와 같은 조직에서 구성원을 어떻게 부르느냐는 매우 민감한 문제다. 한국어의 복잡한 존칭에는 수직적 위계를 중시하는 한국문화의 특성이 배어 있다. 그래서 외국인들은 한국어 학습의 가장 어려운 점으로 존칭법을 꼽곤 한다.

서울시교육청이 교사, 학생 등 구성원 사이 호칭을 ‘○○쌤’이나 ‘○○님’으로 통일하기로 했다. 구성원들이 원할 경우 교장선생님과 학생 간에도 ‘○○님’이라고 부르도록 했다. 수평적 호칭제를 통해 직위와 직급의 구분을 없애고 상호존중하고 배려하는 조직문화를 만들자는 취지다. 서울교육청의 실험이 성공해 학교 구성원들이 서로를 존중하는 풍토를 이뤘으면 한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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