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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갑자기 ‘증세’를 꺼내들었다. 새로 임명된 각료와 당 대표가 총대를 메더니 대통령까지 줄줄이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하는’ 증세를 거침없이 이야기한다. 정부와 여당이, 게다가 대통령이 직접 꺼낸 증세 주장은 국민에게 참 낯설다.한국에선 보수와 진보, 정부와 국회를 막론하고 정치인이 증세를 꺼내는 것은 금기시된다. 세금을 좋아하는 국민은 없기에 선거를 통해 집권하고 선량이 되는 사람들이 드러내놓고 증세를 하겠다는 건 스스로 제 무덤을 파는 것과 같다. 그런데 대통령은 왜 증세를 말할까?

지난 10년 가까이 두 번에 걸친 보수정권은 당연하게 증세를 주장하지 않았다. ‘비즈니스 프렌들리’ 기치로 경제를 살린다고 적극적인 감세에 나서는가 하면 돈이 필요해도 ‘증세 없는 복지’만 내세웠다. 세수결손과 적자재정으로 매년 나라 곳간이 비어가도 법인세율을 인하해 총 50조원 넘게 세금을 줄이고도 비과세 감면으로 100조원 가까이 감면해 그중 80%를 재벌기업이 가져가게 했다. 땀 흘려 번 소득에 비하면 불로소득에 가까운 부동산 등 자산소득과 금융소득엔 중과세를 폐지하고 부자소득인 배당엔 낮은 세율로 과세하는 파격도 마다하지 않았다. 대기업과 부자들의 지갑을 두툼하게 해 투자와 소비를 유도한다는 ‘낙수효과’를 명분으로 삼았다. 하지만 대기업과 고소득층은 끝내 지갑을 열지 않았고 사회의 절대 ‘갑’으로서 창출되는 엄청난 경제적 이익에다 국민혈세 보조금까지 받아 이제는 범접할 수 없는 슈퍼리치와 슈퍼재벌이 되었다.

빈 곳간은 누군가가 채워야 한다. 연간 수조원의 세수결손까지 나는 상태에서 ‘공약가계부’로 재정조달까지 필요하자 나라 곳간은 비어갔다. 당시 경제수석의 말대로 거위 깃털 뽑기는 근로자와 서민, 자영업자와 중소기업이 타깃이었다. 소득공제를 세액공제로 바꿔 근로자의 세금을 올리고 흡연율을 줄인다고 담뱃값을 올려 면세점에도 못 미치는 서민들의 주머니까지 털었다. 이렇게 해서 연간 수십조원씩 세금을 메꾸었다. 전 정부는 그러나 세율 인상을 안 했기에 ‘증세’는 없었다고 강변했다. 이처럼 정치인에게 증세는 금물이다.

그런데 뒤를 이어 집권한 새 대통령이 집권 초기부터 초고소득자와 초대기업에서 세금을 더 걷는 세법안을 마련하겠다고 하자 야당과 재벌기업은 강력하게 반대하면서도 증세가 필요하다면 부자와 재벌기업 등 특정 국민에 대한 ‘핀셋증세’가 아닌 ‘보편적 증세’를 하라고 요구한다. 사회통합을 해치고 위화감을 조성하니 특정 계층이 아니라 전 국민을 대상으로 공평하게 ‘보편증세’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공평한 것 같아 보이는 보편적 증세는 세 부담이 공평하고 조세시스템이 완벽할 때 효과적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부자감세로 왜곡된 세제와 회복할 수 없이 심각한 부익부 빈익빈 경제에서는 위험하다. 대놓고 하든 몰래 하든 보편적 증세는 권력을 위험에 빠뜨리고 결국 정권을 내놓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섣부른 보유세 강화를 명분으로 종부세를 도입하면서 중산층의 분노를 산 참여정부, 증세 없는 복지를 한다면서 근로자와 서민의 깃털만 뽑아낸 박근혜 정부 모두 권력을 내놓았다. 새 정부도 모를 리 없다.

보통 시민들의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새 정부는 국민으로부터 ‘새로운 혁명’을 요구받고 있다. 지난 정부의 ‘세금적폐’를 손보지 않은 채 올해 세법개정안 발표를 비롯한 조세개혁 기회를 허망하게 잃는다면 촛불을 들고 정권을 바꾼 국민들을 설득하기 힘들다. 다행인 것은 지난 정부에서 자영업자와 영세 중소기업이 고통스러운 세정을 겪으며 혈세를 내는 동안 감세와 세제혜택을 몰아준 ‘핀셋감세’ 덕에 재벌기업과 슈퍼리치들의 담세력이 크게 높아져 있다는 것이다.

증세는 정치인뿐만 아니라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누군가 세금을 더 부담해야 한다면 누구보다도 우선 그동안 수혜를 받은 계층에게 그만큼의 세금을 먼저 거두는 ‘핀셋증세’도 나쁘지 않다. 그걸 통해 공평한 세제를 만들고 재정을 채운 후 그래도 세금이 부족하면 ‘보편적 증세’를 위해 사회적 논의기구에서 고통분담의 우선순위에 관한 국민적 합의를 도출해도 늦지 않다.

구재이 | 한국조세연구포럼 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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