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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1일자 지면기사-

한글을 창제한 목적은, ‘훈민정음’의 어제 서문에서 세종이 밝힌 그대로 “한문을 모르는 백성들(愚民)의 편리한 의사표현을 위함”이다. 그러나 일부 학자는 한자음 표기를 위해 훈민정음(이하 한글로 칭함)을 창제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최근에 경제사학자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는 한자음 표기를 위해 한글을 만들었다는 설을 지지하고, 한글은 양반을 위한 문자이지 백성을 위한 문자가 아니라고 했다. 나는 이 글에서 한글이 조선왕조가 망할 때까지 백성의 문자가 되지 못하고, 주로 양반층에서 거의 독점적으로 쓰이게 된 결과는 세종이 의도한 바가 아니라, 양반 지배층의 정치적 의도가 빚어낸 것임을 밝혀 말하고자 한다.

세종 사후에 조선의 양반 지배층은 백성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기 위한 제도를 만들지 않았고, 한글을 쉽게 배울 수 있는 학습 자료도 만들지 않았다. 조선의 양반 지배층이 세종의 뜻을 저버리고 한글을 하층민에게 가르치지 않았다는 증거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1897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국어 문법서 <국문정리>를 지은 리봉운의 말을 들어보자. “조선 사람은 남의 나라 글만 숭상하고 본국 글은 전혀 이치를 알지 못하니 절통하구나. 세종 임금께서 언문을 만드셨건마는 그 후로 국문을 가르치는 학교와 선생이 없어서 글의 이치와 쓰는 규범을 가르치고 배우지 못하였다.” 19세기 말기의 지식인이었던 리봉운은 세종이 한글을 만들었지만 쓰는 법을 가르치는 학교와 선생이 전혀 없었음을 한탄한 것이다.

양반층은 최세진이 <언문자모>에서 한문으로 설명한 한글 음절 생성 원리를 활용하여 한글을 배우는 데 가장 쉬운 음절표를 만들어 썼다.  1719년 조선통신사 서기로 일본에 간 강백과 장응두는 일본인에게 한글 음절표를 써 주었다. 양반 지식인들은 일본인에게는 한글 음절표를 가르쳐줬지만 조선의 하층민들에게 이를 널리 알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한글 음절표의 최초 간행은 양반층이 아니라 사찰 승려들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1869년에 해인사 도솔암에서 간행된 <일용작법>이란 염불집에 ‘언본’이란 이름의 한글 음절표가 처음 수록되었다. 그 후 1877년(기축신간반절)과 1889년에 낱장의 목판에 새긴 한글 음절표가 간행되어 장터에서 팔린 것이 전해진다. 낱장짜리 한글 음절표는 판매를 목적으로 한 상업 출판으로, 민간의 자생적 산물이었다. 만약 이런 형식의 한글 음절표가 15세기나 16세기에 나와서 보급되었더라면 한글 습득자가 빠르게 늘었을 것이다. 조선 정부가 한글 음절표를 처음으로 공간한 것은 갑오개혁 이후이다. 소학교령이 공포되고 1896년에 학부에서 간행한 <신정심상소학>에 허술한 모습이긴 하지만 한글 음절표가 처음 수록되었다. 세종의 뜻을 정부가 나서서 실천하기 시작한 것이 한글이 반포된 지 450년이 지난 후였다는 말이다.

조선의 양반층이 평민 이하 하층민에게 한글을 가르치지 않은 이유는 이들이 글을 배워서 자신들을 비판하는 것이 두려워서다. 연산군 대의 언문 익명서 사건뿐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에는 익명서 사건이 문제가 되어 임금과 조정 대신들이 모여 논의한 기록이 여러 번 등장한다. 한글 문서를 금지하는 법을 정했고(1675년), 한글 문서를 관에 제출하는 것 자체를 불법으로 간주한 기록들이 실록에 나타나 있다. 하층민이 한글 문서로 자신들의 뜻을 표현하는 것 자체가 싫었던 것이다.

한글이 조선왕조 내내 양반들의 문자로 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세종이 양반만을 위한 성군일 뿐 일반 백성을 위한 성군이 아니었다는 주장은 오해에서 비롯된 진실의 왜곡이다. 조선을 ‘양반의 나라’로 만든 것은 세종이 아니라 권력을 쥐었던 양반집단이다. 한글이 백성 모두의 문자가 되지 못한 것은 세종의 본뜻을 저버린 양반집단 때문이다.

백성을 위해 한글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한자음 표기를 위해 만들었다는 주장은 훈민정음 해례본에 실린 세종 어제 서문의 뜻과, 사관들이 쓴 <세종실록>을 부정하는 것이며, 세종이 지은 글과 사관의 기록을 모두 거짓말로 간주하는 것이다.

<백두현 경북대 인문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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