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일 년 중에 가장 슬픈 날은 야구가 끝나는 날이다.” LA 다저스를 두 차례나 월드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던 왕년의 명장 토미 라소다가 한 말이다. 한국의 야구팬들에게 ‘박찬호의 양아버지’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적어도 올해 한국의 야구팬들에게 더 슬픈 날은 야구가 끝난 닷새 뒤였다. 올해의 야구는 지난 2일 두산 베어스가 NC 다이노스를 4연승으로 몰아치고 한국시리즈 2연패를 달성하며 끝났지만, 그 여운이 식기도 전인 7일에 경기북부지방경찰청이 프로야구 선수들의 도박과 승부조작에 관한 수사결과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물론 경찰의 발표 자체가 새로울 것은 없었다. 도박과 승부조작은 적어도 1년 넘게 야구계를 시끄럽게 만든 화제였다. 작년 한국시리즈를 코앞에 두고 핵심 투수 3명의 해외 원정도박 사실이 알려진 삼성 라이온즈는 결국 5년 연속 우승의 문턱에서 주저앉았고, 올 7월에는 각 팀의 차세대 에이스로 꼽히던 유창식(KIA)과 이태양(NC)이 승부조작에 가담한 사실을 자백했다. 하지만 경찰이 더 많은 선수들이 도박과 승부조작에 가담한 정황을 파악하고 추적 중이라는 사실이 공공연히 알려졌고, NC 다이노스 구단은 압수수색을 당하기도 했다.

프로야구 승부조작 이미지 그래픽 (출처: 경향신문DB)

정작 경찰의 수사 발표에 새로이 포함된 선수의 이름은 많지 않았다. 승부조작에 가담한 선수, 승부조작을 부탁했다가 거절당한 선수, 불법 스포츠 도박에 돈을 건 선수 몇 명이 추가로 밝혀지긴 했지만 머릿수로나 이름값으로나 야구팬들이 예상했던 선을 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문제도 있었다. 우승팀 두산 베어스와 준우승팀 NC 다이노스가 각각 소속 선수들이 스포츠도박과 승부조작에 연루된 사실을 알고도 한동안 은폐했음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사이 두산은 문제의 선수를 계속 경기에 내보냈고, NC는 그 선수를 신생팀에 떠넘기면서 10억원이라는 돈을 챙겼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법 이전에 기본적인 상식과 도리를 내팽개친 천박한 민낯이라는 비판 앞에 아무 할 말이 없을 일이다.

이 사태를 지켜보며 야구팬은 비참해진다. 때로는 투닥거리고 유치한 비난을 주고받기도 하지만,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팀이 ‘공정하고 정당한 경쟁을 통해 당당하게 이겨주는 것’ 말고 야구팬이 바라는 것이 뭐가 있겠는가. 하지만 선수들은 돈 몇 푼 앞에서 이기기를 포기했고, 구단들은 오직 이기기 상식과 도리와 법마저 외면했다. 한편에 서서 함께 울고 웃었다고 믿었던 선수와 구단이 내 눈물과 함성을 팔아 제 주머니를 챙겨왔음을 알게 된 비참함은 시간이 흐른다고 지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건 누구나 안다. 세상 사람들이 정당한 방법으로만 경쟁하리라고 기대하거나 경쟁의 결과가 노력에만 달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다. 돈도 힘이라고, 억울하면 부모를 원망하라고 조롱을 받아도 딱히 갖다 댈 말이 없어 한 번 더 무너지는 것이 흔한 흙수저들의 가슴이다.

그래서 경기장은 더더욱 깨끗해야 한다. 그곳은 우리 사회에서 공정한 룰과 정당한 경쟁을 통해 결과를 만드는 유일한 곳이며, 언젠가는 만들어야 할 그런 세상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나마 잊지 않게 해주는 상상력의 근거지이기 때문이다. 그곳은 노력하면 무엇이든 이루어지고, 포기하지 않으면 언제든 역전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꾸게 해주는 곳인 동시에 응원하는 선수들의 몸을 빌려 대신 체험해보는 곳이기 때문이다.

지난 몇 주간 질리게 보고 들은 대통령과 그 일당의 일탈, 수사기관의 비굴함, 언론사들의 머뭇거림에 대해 다시 곱씹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일상과 정치에서 상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기만당하고 소외당한 한국인들에게 한 술 보탠 야구단과 선수들, 당신들은 정말 해도 너무했다. 이렇게까지 엉망진창인 세상에서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 마음 기대고 살아가란 말인가.

김은식 | 작가·야구평론가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5/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