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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개 체육단체 5만여명이 시국성명서를 발표했다. 스포츠와 연관된 국가적 사안은 물론 체육계 현안에 대해 좀처럼 성명서를 내는 데 인색했던 22개 체육단체의 성명서라서, 한편 반갑기도 하지만 동시에 놀랍다는 인상마저 든다.

보도에 따르면, 한국체육학회와 11개 분과 학회 4만872명에 더해 한국체육단체총연합회 11개 단체 1만837명 등 총 22개 단체 5만1709명의 성명서라고 하는데, 이 엄청난 숫자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요즘은 시절이 하수상하여 많은 사회단체들이 성명서를 내고 있는데, 최소한 성명서의 핵심 내용을 미리 알리고 단체 메일이나 문자 서비스를 통해 동의 여부를 확인한 후 발표하는 게 상례다. 과연 5만여명에게 그러한 절차를 거쳤는지 의문이다. 애초에 학회나 단체에 가입할 때 특정한 사건에 대하여 성명서를 발표할 경우 회원 각자의 의견을 묻지 않는 것에 동의를 구하는 절차라도 있으면 모르거니와 설령 그런 절차가 없다 해도 그 또한 문제이다. 만약 총 22개 단체 5만여명의 동의 과정이 없었다고 한다면, 이번 성명서는 그 단체의 집행부 이름으로 발표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동의 절차부터 거론하는 것은, 22개 체육단체 명의로 발표된 성명서의 주요 내용이 한국체육학회의 11개 분과 회원들 각자의 학문적 소신이나 현 시국을 바라보는 관점, 특히 평창올림픽에 대한 생각과 서로 다르거나 심지어 대립적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성명서는 “박근혜 정부 4년은 우리나라가 스포츠 선진국으로 발전할 매우 중요한 기회를 잃어버린 체육 정책의 실패였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이 정도의 판단에는 나 역시 동의한다. 아마도 많은 체육 관련 행정가, 학자, 종사자들이 “체육계 4대악 청산이라는 미명 아래 선의의 체육인들을 표적 수사”를 하였고 “K스포츠재단을 만들기 위해 체육인재육성재단을 멋대로 없”애버린 사안에 대해서도 함께 분노할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보면, 깊이 있는 자성은 없으며 날카로운 비판도 없다. 22개 체육단체의 성명서의 핵심을 보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평창동계올림픽 성공적 개최를 크게 방해했고 올림픽 성공을 통해 이루고자 한 국가 발전 원동력을 약화”했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바로 이러한 인식이 나는 문제의 근원이라고 생각한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달리 표현하면 ‘평창 게이트’라고도 할 수 있다. 문제는 거의 모든 체육계 인사들과 단체들이 올림픽을 황금알 낳는 거위로 여겨 달려들었는데 그만 최순실·김종·차은택 등이 그 거위의 배를 갈라버렸다고 비난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상 모두가 돌을 던지자 뒤늦게 돌을 던지는, 뒤늦은 시차도 문제다. 스포츠 권력이 살아 있을 때, 그들이 ‘올림픽은 국가지대사’라는 철지난 명분을 앞세워 권력을 휘두르고 막대한 이익을 탐하고 체육계에 모멸감을 안기는 전횡을 할 때, 한편 무서워서 피하거나 다른 한편 그 먹이사슬의 한 칸 위에 편승하려고 했던 일부 체육계 인사들마저도 돌을 던지는 판국이다. 단지 최순실이나 김종과 힘겨루기를 해서 패했을 뿐인 과거의 평창올림픽조직위원장이나 그 밑에서 일했던 권력지향적 인사들마저 자신들이 마치 거대한 악의 세력에 맞서 싸운 사람인 양 코스프레를 하고 있지 않은가.

올림픽이야말로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하는 20세기 중엽의 인식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상태에서는 온갖 개발과 특혜와 전횡의 게이트가 숱하게 재연될 뿐이다. 이번에는 김종·최순실·차은택이 그랬지만 과거에는 또 다른 권력 실세들이 그랬었고 앞으로도 또 다른 권력의 비선들이 그러할 것인 바, 올림픽이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하는 전근대적인 국가주의 인식이야말로 국민의 세금을 탕진하고 선수들의 땀방울을 얼룩지게 하는 근원이다. 이 낡은 인식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에 결국 성명서는 “무분별한 예산 삭감은 많은 부작용을 초래할 것”이라면서 탄원하는 수준에 머물고 말았다. 이참에 올림픽이 진실로 국가 발전의 원동력인지 꼼꼼히 살펴보자는 인식은 전무하다. 막대한 적자, 부실한 운영, 실현 불가능한 사후 활용 계획 등에 의해 평창올림픽 이후가 심각하게 우려되는 상황임에도 성명서는 ‘국가 발전 원동력’이라는 단어를 앞세우고 있다. 어쨌거나 올림픽이라는 거위가 황금알을 낳을 거라는 낡은 인식이다.

그래서 앞에서 나는, 이번 성명서가 과연 5만여명의 의견을 최소한이라도 수렴한 것인가, 하고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한국체육학회의 회원들 중에는 올림픽 같은 스포츠 메가이벤트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고 주장하는 국가주의 스포츠 정책에 대해 이론적으로 비판적일 뿐만 아니라 평창올림픽이 경제 개발 효과는커녕 오히려 국가 재정에 위기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현실적 판단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한국체육단체총연합회는 지난 10월1일, 통합 체육회장 선거 후보자 토론회를 사실상 비공개로 진행했다. “후보자들의 자질과 소명의식을 검증하고 체육인들에게 정보 및 알 권리를 제공하기 위해 토론회”를 마련했다고 하면서, 정작 현장에서는 사전에 5개의 공통 질문을 준 뒤 각자 발표하는 형식이었고 그나마도 각자의 지지자들과 취재진 말고는 청중의 참여와 질문이 차단된 토론회였다. 바로 이런 폐쇄적이고 허약한 구조야말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는 독버섯이 자라나기 좋은 토양이다. 이런 상황에 대한 심각한 자성과 근본적인 질문 없이 그저 몇몇 사람을 악당이라고 지목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언제든지 한국 스포츠계는 독버섯의 토양이 되고 말 것이다.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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