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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는 덫인가, 새로운 기회인가?’ 세계화의 흐름이 거세지던 2000년대 초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이 저서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를 통해 던진 질문이다. 세계화의 흐름은 피할 수 없고, 세계화의 법칙에 맞추지 못하는 나라는 덫에 걸리게 된다는 게 프리드먼의 주장이었다.

냉전 이후 세계화는 인류의 가장 뜨거운 화두였다. 소련 해체로 냉전체제는 붕괴하고, 신자유주의에 기반한 세계화가 이를 대체하는 글로벌 질서로 등장했다. 좋든 싫든 국가와 기업은 세계화를 받아들여야 했다. 세계화는 승패를 가르는 새로운 게임의 규칙이 되었고, 세계의 부를 배분하는 유일한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던 세계화에도 어느덧 종말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기후변화와 팬데믹, 디지털 전환, 패권 변동 등으로 기존과 같은 방식으로는 더는 살아갈 수 없게 된 탓이다. 그렇다면 세계화 다음의 질서는 무엇일까. 환경·사회·지배구조(ESG)로 재편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실제 세계화는 ESG로 재편 중이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은 2020년 1월 연례편지를 통해 향후 투자 결정 과정에서 지속 가능성과 기후변화 대응을 핵심 목표로 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계에 달한 자본주의를 구해내려면 물질 중심의 성장을 벗어나 환경과 인권, 다양성 등의 가치를 기업의 재무적 요소로 끌어안아야 한다는 게 ESG의 핵심이다.

세계화의 질서가 ESG로 대체되며 또 한 번의 대전환이 일어나고 있다. 이제 우리의 질문은 달라져야 한다. ‘ESG는 덫인가, 새로운 기회인가?’ 비상한 각오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한 기업에는 기회지만, 소극적으로 변화에 뒤따르면 리스크가 될 것이라는 데 이견은 없다.

특히 2023년은 ESG가 덫인지, 기회인지 구분하는 분기점이다. 수년 전부터 논의됐던 ESG 가이드라인이 일정 합의를 거쳐 명확한 지표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실제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는 ESG 공시 기준 최종안 발표 초읽기에 들어갔고, 유럽연합(EU)은 이미 기업지속가능성보고지침(CSRD)을 최종 승인했다. 이는 내년부터 ESG가 제도적 차원의 영향력을 갖게 됨을 의미한다. 무엇보다 스코프3(Scope3)와 기후 관련 시나리오 분석 적용 여부에서 기업의 성패가 갈릴 것으로 예상된다. 스코프3는 탄소배출 측정 범위에 협력업체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시나리오 분석은 기후변화로 인한 가뭄과 홍수 등이 해당 기업에 얼마나 피해를 줄 것인지, 탄소중립과 제도 변화로 어떤 영향을 받을지 미래의 리스크까지 평가해서 공시하는 것을 말한다.

대한민국은 다량의 탄소를 배출하는 제조업 중심의 수출산업 구조를 가졌다. ESG 공시 기준을 충족하려면 남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특히 기업 혼자만 잘해서는 안 된다. 공생을 위한 산업생태계 형성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협력업체와 마주하고 대응방안을 함께 마련해야 한다. 더 나아가 당장의 이윤이 아닌 인권과 안전, 환경 등 지속 가능한 가치를 경영에 내재화하기 위한 고통도 감내해야 한다. 당장은 ESG로의 전환이 비용이겠지만, 멀게 보면 미래를 위한 투자다. 지금 이 순간이 ESG를 덫이 아닌 기회로 만들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일지 모른다.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과 흔들리지 않는 혁신으로 ESG로의 전환을 서둘러야 한다.

백범 김구 선생은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가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꿈꿨다. 우리는 압축성장을 이루며 선진국의 반열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나라라고 자부하기에는 부족함이 크다. ESG는 경제와 행복의 거리를 좁히고, 성장과 환경의 모순을 줄이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ESG로의 전환이 대한민국을 가장 아름다운 나라로 이끄는 물길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남덕현 한국수자원공사 언론 홍보부장·(사)한국ESG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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