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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원로서예가의 작업실을 방문했다가 상당한 양의 서적과 카메라 수집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동양의 고전을 비롯해 수많은 한문책과 중국 서적들로 가득 찬 서가에서 쉽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문자학과 서예, 전각과 관련된 주옥같은 책들이 주욱 도열해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당연히 있을 법한 골동품이나 고서화는 한 점도 눈에 띄지 않아 물어봤더니 자신의 눈에 차는 게 없어 수집한 게 없다는 답변이 왔다. 나름의 감식안에 대한 자신감과 자기 취향에 대한 확고한 기준이 있다는 점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좋은 수집이란 횡적인 수집이 아니라 종적인 수집이며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나 뛰어난 질을 확보하고 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우선적으로 미적 감각을 충족시키는 충만한 느낌이 탁월해야 한다. 사실 예술가란 존재는 그가 수집하고 있는 물건들을 통해 자신의 안목, 감각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편이다. 물론 본인의 작품 자체가 이미 그 자신의 감각의 결정체에 다름 아니다. 결국 한 인간의 삶이나 작품, 그의 수집품은 그만의 감수성, 감각, 취향을 전적으로 대변하고 있고 발화하고 있다. 예술은 전적으로 그것을 가시화하는 일이자 독하게 뿜어내는 일이다.

어느 순간 큐레이터와 평론가가 직업이 된 후로 나는 자연스레 다양한 것들을 수집하게 되었다. 당연히 여러 종류의 책들이 뒤를 잇고 화집과 전시도록 등 많은 자료들을 욕심껏 끌어안고 있다. 그런데 거기에 덧붙여 각종 문구류, 상당한 양의 CD와 골동품, 다양한 미술작품 등을 구입해 탐닉하고 있다. 나는 그것들과 함께 생애를 기꺼이 소진시킨다. 책은 읽고 문구류는 쓰는 한편 CD는 듣지만 골동품과 작품 혹은 매력적인 오브제라 모아둔 것들은 전적으로 완상하는 차원에서 수집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렇게 해서 내 좁은 연구실에는 수많은 물건들로 가득하다. 내 한몸이 겨우 비집고 들어올 만한 여유밖에는 없는, 마치 통조림통 속같이 좁고 밀폐된 곳, 사물들로 가득한 그곳에서 오래된 물건들과 함께 살고 있다. 나는 그 사물들만을 그토록 편애한다. 실용적 차원에서 쓰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그 형태와 색상, 질감과 디자인을 마음껏 감상하고 향유하는 일이다. 이는 사물과 유희하는 일이자 그것과 더불어 몽상에 잠기는 일이다. 고독한 나를 그 사물들이 구원해 준다는 느낌이다.

이처럼 나는 매일 무엇인가를 수집하고 바라보고 좋아하면서 은밀한 시간을 보낸다. 이 자폐적인 사물과의 독대는 그것들이 발화하는 음성을 듣는 일이자 그 생김새와 색채, 질감을 편애하는 일이다. 미술평론가로서 작품을 보러 다니고 마음에 드는 이미지를 생각하고 그것에 대해 글을 쓰는 일이 일과지만 실은 틈틈이 골동 가게와 서점, 문방구 또는 온갖 가게들을 들락거리면서 내 마음에 ‘쏘옥’ 드는 그 무엇인가를 찾아 수집하는 것이 주된 일인 것도 같다.

나는 깜찍하고 귀엽고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 그러나 기품 있고 자연스러우며 과도하지 않은 미감을 두른 것들을 찾는다. 그것은 언어로 설명하기 어렵다. 보는 순간 깨닫는다. 나는 언제나 그토록 예민하고 감각적인 것들을 골라내는 안목과 마음을 갖고 싶기도 하다.

그것들을 지독히 편애하면서 살고 싶다. 결코 문드러지지 않는 감수성과 좋은 것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욕망으로 끝까지 가고 싶은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사는 동안 나의 소원이 있다면, 꿈이 있다면 첫번째는 그동안 사 모은 책을 다 읽고 죽는 것, 두번째는 역시 수집해놓은 CD음반을 반복해서 다 듣고 가는 것, 세번째가 이렇게나 많은 필기구와 수첩, 노트를 죄다 쓰고 죽는 것이다. 그다음으로는 필사적으로(?) 수집한 골동품을 마음껏 완상하고 이후 이를 책으로 엮은 후 정리하고 가는 것이다. 그 외에 어떠한 소원도 희망도 꿈도 가진 적이 없다. 진정으로 나는 무엇이 되고 싶었던 적도 없다.

그나마 내가 욕망하는 것이라면 빼어난 아름다움과 탁월한 조형미를 두른 것들을 통해 내 안목과 감각을 고양하고 높은 취향과 눈썰미를 갖기를 간절히 원한다. 놀라운 눈을 애타게 갈구하는 것이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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