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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 지난 7일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이 담당 기자들에게 보낸 사진을 보며 15년 전 개봉한 한 영화의 카피를 떠올렸다. 이런 사진을 받아보게 될 것이라고 몇시간 전에 예고를 받기는 했지만 직접 보니 말 그대로 상상 이상이었다. 사진을 계속 보고 있자니 초현실적인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사진 속에서는 눈썹까지 하얀 노스님이 누군가의 손 앞에 입을 벌리고 있었다. 조계종 총무원은 사진에 이런 해설을 달아 보냈다.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설정 스님은 서울지방법원 제25민사부로부터 유전자 감정일을 지정받고 금일(8월7일) 오전 9:30분 서울의대 법의학교실 연구실에서 구강 점막세포 채취를 진행했습니다.’ 설정 스님이 ‘친자확인’을 위해 유전자 검사에 응했음을 증명하는 사진이었다.

조계종의 현 상황은 짧은 기사로는 설명을 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다. 설명도 어려울뿐더러 드라마 뺨치는 빠른 전개와 반전에 ‘경마식 중계’를 하지 않으면 따라가는 것조차 벅차다. 현 총무원장이 ‘은처자’(숨겨둔 부인과 자식)가 있다는 의혹을 받는 것으로도 이미 ‘갈 데까지 간 상황’인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오히려 진짜 권력다툼은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됐다.

불교계 개혁을 요구하는 재야세력과 조계종 내부 모두로부터 사퇴 압박을 받자 설정 스님은 지난달 27일 ‘퇴진’을 공언했다. “종단 주요 구성원분들께서 현재의 상황을 지혜롭게 극복하기 위한 뜻을 모아주신다면 그 뜻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명분을 만들어주면 사퇴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이어 지난 1일에는 교구본사주지협의회장인 성우 스님을 만나 “16일 이전에 용퇴하겠다”고 밝혔다.

‘아름다운 사퇴’가 이뤄지나 싶었다. 그러나 ‘반전’은 남아 있었다. 설정 스님은 지난 9일 갑자기 인사권을 행사했다. 성문 스님을 총무부장, 진우 스님을 기획실장으로 새로 임명했다. 자신의 사퇴를 압박하는 ‘조계종 내부 세력’에 대한 저항으로 읽혔다.

여기서 끝났으면 굳이 칼럼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신임 총무부장인 성문 스님은 임명 하루 만인 지난 10일 사퇴해버렸다. 설정 스님의 퇴진을 종용하고 있는 전 총무원장 자승 스님의 힘이 작용했다는 소문이 바로 돌았다. 설정 스님은 13일 다시 새로운 총무부장을 선임하려 시도했으나 또 실패했다. 그리고 긴급기자회견을 열어 “기득권 세력에 의해 은밀하고도 조직적으로 견제되고 조정되는 상황을 목도했다”며 연말까지 총무원장직을 수행하겠다고 선언했다.

지난달 중순 새로운 부서에 와서 종교 취재를 담당한 지 한달도 되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이 모든 ‘반전’들이 일어났다. 종교 담당으로서 ‘좋은 말씀’만 독자들에게 전하려 했던 순진한 희망은 금방 물거품이 됐다.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소개를 받아 연락한 한 불교계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웬만한 정치인들 뺨치는 일들을 더 보게 될 겁니다. 너무 놀라지는 마세요.”

사실 더 놀라운 일은 따로 있다. 조계종 안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일부 교인을 제외하면 아무도 관심이 없다. 지난 6월부터 조계종 종단개혁과 설정 스님 퇴진을 요구하며 설조 스님이 40여일간 단식을 이어갈 때도 불교계 내부에서만 반향이 일어났다.

언론이 보도를 제대로 하고 있지 않은 탓도 조금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언론이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사안이 아예 묻히는 시대가 아니다. 언론의 도움 없이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만으로도 여론을 형성할 수 있다. 단지 이번 사안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관심을 두지 않을 뿐이다. 2005년 통계청 조사에서 1058만명으로 집계됐던 불교인구는 10년 만인 2015년에는 761만명으로 대폭 감소했다. 기대가 없으면 관심도 생기지 않는다.

<홍진수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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