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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도 남쪽의 도시 자카르타는 겨울에서 여름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대회 폐막을 하루 앞둔 2일 겔로라 붕 카르노(GBK) 이스토라 아레나에서는 여자 농구 결승전이 열렸다. 남북단일팀과 중국이 맞붙었다. 세계 정상을 넘보는 중국을 상대로 단일팀은 예상 외의 팽팽한 승부를 펼쳤다. 북측 로숙영이 석연치 않은 파울 판정으로 파울 트러블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경기가 어찌 될지 몰랐다. 단일팀은 65-71로 졌고 은메달을 땄다. 단일팀을 이끈 이문규 감독은 미국여자프로농구(WNBA)에서 뛰고 있는 박지수를 대표팀에 뽑았다. WNBA 일정상 대표팀 합류가 불투명했다. 박지수가 빠진 채 11명의 대표팀으로 조별리그 경기를 모두 치렀다. 4강부터 합류한 박지수는 결승에서 몸이 부서져라 뛰고도 눈물을 쏟았다. “농구선수가 코트에서 체력이 부족하다는 건 말이 안된다”며 울었다. “내가 0점짜리 경기를 했는데, 언니들이 잘해줘서 접전을 펼칠 수 있었다”고 했다. 주장 임영희는 “지수가 미안하다고 하는데, 지수가 있었으니까 이런 경기 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감독은 “감독 입장에서 선수들이 기대 이상으로 해줬다. 정말 고맙다”고 했다.

금메달 따고도 웃지 못하는 선동열호 2018 자카르타·팔렘방에서 금메달을 딴 야구대표팀 선수들이 3일 인천공항으로 귀국한 뒤 해단식을 하며 기념 촬영하고 있다. 인천공항 _ 연합뉴스

야구 대표팀은 일본에 3-0으로 이기고 금메달을 땄다. 목에는 금메달이 걸려 있는데 표정은 예선 탈락 팀이었다. 라커룸에서 나온 선수들이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모두 휴대전화에 고개를 박고 있었다. 수없이 쏟아진 축하 메시지에 기계적으로 ‘고맙다’는 답만 달고 있었다. 사적인 대화에서도 섣불리 기쁨을 드러낼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오지환이 굳은 표정으로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금메달 축하한다”는 인사에도 그저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이어 열린 축구 결승전. 연장까지 가는 치열한 승부 끝에 축구 대표팀은 일본을 2-1로 이기고 금메달을 땄다. 선수들은 한데 엉켜 마음껏 기쁨을 누렸다. 김학범 감독은 “선수들이 열심히 해줘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말했다. 황의조 발탁 때 불거진 ‘인맥선발’ 논란에 대해 “나는 학연이나 지연, 의리를 가지고 축구하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던 김 감독의 말이 새삼 떠올랐다. 황의조는 9골을 터뜨리며 감독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선동열 야구 대표팀 감독은 ‘부담감’과 ‘압박감’을 얘기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는지, 할 것인지는 얘기하지 않았다. 다음 대회에 또 “최고의 선수를 뽑겠다”고 했다. 선수들이 금메달을 따고도 죄인처럼 고개를 박는 건, “최고의 선수”라는 말 때문이었다. 최고를 뽑았는데, 최고로 인정받지 못했고 최고의 경기를 보여주지도 못했다. 선 감독은 이들이 왜 최고인지 설명하지 않았다. 오지환은 겨우 3타석만 나왔다. 역시 설명은 없었다. 선 감독은 방송 인터뷰에서 응원과 질책을 함께 보낸 팬들에게 한마디 해달라는 질문에 “다음에 합시다”라며 피했다. 사과도, 감사도 없었다. 자신의 판단이 옳다는 것을, 어쨌든 따낸 금메달과 침묵으로 대신하고 싶어했다.

앞서 지켜본 또 하나의 장면이 생각났다. 여자 농구 결승전이 끝난 뒤 중국팬들은 ‘야오밍’의 이름을 외쳤다. 중국의 ‘국보급 스타’라고 할 수 있는 야오밍은 중국 농구협회 임원 자격으로 이번 대회에 함께했다. 중국 선수들의 세리머니가 끝난 직후였다. 야오밍은 코트 건너편 스태프를 만나기 위해 코트 안에 들어섰다가 서둘러 물러났다. 코트를 밟는 대신 골대 뒤쪽으로 천천히 돌아 건너편으로 넘어갔다. 코트 안에 함부로 자신을 들이지 않았다. 그 큰 키를 낮춰 자기가 주인공이 아님을 선언하듯 발걸음을 뗐다. 국보의 품격이 느껴졌다.

과정이야 어떻든 자신의 결정이 무조건 옳다고 주장했던, 설명해달라는 요구에 다 나라를 위한 것이라며 침묵으로 버텼던 몇몇 이들이 떠올랐다. 우리 사회는 더 이상 그런 이들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게 이미 2년 전 겨울 증명됐다.

<이용균 스포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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