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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스포츠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1980년대 한국 군사정권이 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을 차단하기 위해 스포츠를 적극 이용했다는 것은 유명한 얘기다. 월드컵은 민족주의의 전시장이고, 올림픽 역시 정치 선전 도구이자 집권세력의 통치 수단으로 활용된 사례가 적지 않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북한의 올림픽 참가) 기회를 최대한 활용해 북한을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 정책을 위한 대화의 장으로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올림픽을 대북 정책 수단의 하나로 이용하겠다고 천명했던 셈이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제정한 ‘올림픽 헌장’은 이런 정치적 외풍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명시하고 있다. 올림픽 헌장은 “스포츠와 운동선수를 정치적 또는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에 반대한다”고 선언하면서 “올림픽 현장에서 어떤 종류의 시위도 금지되며 정치적, 종교적, 인종주의적 선전도 허용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24일 광주광역시 광산구 남부대 시립국제수영장에서 열린 2019 광주세계수영선수권대회 경영 남자 자유형 800m 결승에서 중국의 쑨양이 경기를 마친 뒤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연합뉴스

말뿐인 조항이 아니다. 이를 위반한 선수는 징계위원회에 회부된다. 2012년 런던 올림픽 축구 3·4위전에서 축구대표팀 박종우는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어 보였다가 동메달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했고, 메달도 박탈당할 뻔했다.

IOC가 선수들의 정치적 의사표현을 금지하는 이유는 이념과 이해관계가 아닌, 인체의 힘과 속도로 대결하는 스포츠의 순수성을 지키겠다는 의지 때문일 것이다. 스포츠가 정치나 사회와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은 IOC도, 선수도, 팬들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스포츠와 정치·사회를 분리하려는 것이다. 적어도 이 세상에서 스포츠 세계만큼은 땀과 노력이 보상받는 곳, 참여자 모두가 규칙을 준수하는 곳, 규칙을 위반할 경우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하는 아름다운 곳으로 보전하겠다는 뜻이다. 공정성이 무너질 때 스포츠의 가치는 근간부터 흔들린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지난 28일 폐막한 2019 광주 세계수영선수권대회는 이례적인 장면을 낳았다. 몇몇 선수들이 공개 시위를 벌였는데, 독재정권이나 인종차별에 항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포츠의 공정성을 지켜달라는 요구였다. 

호주 대표팀의 맥 호턴은 지난 21일 남자 자유형 400m에서 은메달을 차지한 후 메달 시상대에 오르는 것을 거부했다. 금메달리스트인 중국 대표팀 쑨양이 2014년 도핑 검사에서 금지약물 트리메타지딘 양성 반응을 보인 전력이 있고, 지난해 9월엔 자신의 도핑 검사용 혈액 샘플을 망치로 깨뜨려 도핑 관련 기구의 업무를 방해한 혐의가 있기 때문이다. 이틀 후에는 남자 200m 자유형 공동 3위인 영국의 던컨 스콧이 메달 시상식이 끝난 후 1위 쑨양의 악수를 거절했다. 스콧은 언론 인터뷰에서 “쑨양이 수영을 존중하지 않았는데 왜 우리가 쑨양을 존중해야 하느냐”고 말했다. 시위를 벌인 호턴과 스콧은 선수촌 식당에서 다른 서구 선수들의 박수와 환호를 받았다. 

논란이 커지자 국제수영연맹(FINA)은 선수 행동규범 조항에 ‘메달 시상식 등에서 다른 선수를 겨냥한 의사표현을 금지한다’는 내용을 신설했다. FINA 인사들은 쑨양이 도핑 샘플을 훼손했을 때 미온적인 경고 조치에 그쳐 이번 사태를 부른 장본인들이다. 외부 정치세력이 아니라 스포츠계 내부인들이 스포츠 가치의 근간을 흔들고 있는 셈이다.

세계반도핑기구는 스포츠중재재판소에 FINA를 제소한 상태다. 호턴과 스콧의 의사표현 방식이 옳고 그름을 떠나, 쑨양의 출전이 선수들에게 대회 공정성에 대한 의구심을 품게 만들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한국 민주화운동의 성지였던 광주는 본의 아니게도 수영계 공정성 회복을 원하는 선수들의 목소리를 전 세계로 전달한 장이 됐다. 쑨양 문제를 다룰 스포츠중재재판소의 심리는 9월 시작된다.

<최희진 스포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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