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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장이 국가정보원의 사찰을 받았다는데 3000명에 달하는 판사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법원 게시판도 조용하고 판사들 사이에 화제도 아니다. 전직 대법원 고위 관계자는 “양승태 원장이 업무시간에 등산 갔다는 내용이잖아요”라고 심드렁히 말했다. 이렇게 되니 “실로 중대한 반헌법적 사태”라는 헌정사상 가장 강경한 성명을 읽은 대법원 공보관만 무람한 처지가 됐다.

정권의 간섭에는 어김없이 저항해온 다섯 차례 사법파동은 우리 법원의 자랑스러운 역사다. 권력에 순종하고 협력해온 검찰은 흉내조차 내본 적이 없는 일이다. 이런 사법부의 수장이 ‘실로 중대한 반헌법적 사태’를 선언하는데도 판사들은 냉담하다. “사생활을 들춰낸 것도, 재판의 결론을 알아낸 것도 아니다. 업무시간에 등산을 갔다는 것뿐이다. 대법원도 예상한 수준 아니냐”고 판사들은 말했다.

나는 노무현 정부 시절부터 법원에 출입했는데 그때도 법원 담당 국정원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공보관도 만나고 법원장도 만나 돌아가는 얘기를 들었다. 고백하자면 나 역시 이들과 정보를 주고받던 시절이 있다. 최근에는 판사들이 국정원의 사상검증을 거쳐 임관한다. 양승태 대법원은 대수롭지 않다고 반응했었다. 등산 문제로 발끈하는 대법원장이 그래서 어색한 것이다.

국회 청문회 도중 불거진 대법원장에 대한 사찰 의혹이 알려진 15일 양승태 대법원장이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퇴근하며 기자의 질문을 받자 손사래를 치고 있다. 정지윤 기자

판사들은 속내를 털어놨다. “이미 한참 전에 김영한 전 민정수석 업무수첩이 공개됐다. 청와대가 판사들을 손보려고 벼른 사실이 드러났지만 말 한마디 없던 대법원 아니냐”고 했다. 실제로 법원행정처는 관련 법관 징계는 청와대에 영향받지 않았다는 동문서답을 대통령이 탄핵된 지난 9일에야 내놓았다. 정권의 판사 위협에는 관심도 없고, 오로지 대법원장의 순결만 주장하는 태도였다.

청와대의 표적들은 빠짐없이 고초를 겪었다.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 무죄 판결을 비판한 김동진 판사, 선박 사고 영장을 기각하면서 세월호 사고와 국가의 책임을 언급한 이형주 판사, 국가보안법 사범에게 일부 무죄를 선고한 박관근 판사 등이다. 게으른 기자인 나는 모르는 사건들이 산처럼 많을 것이다.

판사들의 싸늘한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대법원은 등산사찰 항의 성명에 이렇게 덧붙였다. “청와대 등에서 법원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였다는 의혹이 최근 제기된 바 있으나,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닐 뿐만 아니라 법원으로서는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청와대의 시도가 전달되지는 않았다며 이번에도 대법원장만 보위했다.

이런 대법원이 최근 대법원장의 강력한 인사권을 복원하는 인사 방침을 공식화했다. 역사를 되돌리는 일이다. 앞서 2010년 국회는 대법원장의 지나친 인사권을 해소하는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만들었다. 대법원장이 지방법원 부장판사 중 일부를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승진시키고, 이들을 다시 추려 대법관에 제청하면서 법관들을 줄 세우는 폐해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외부의 압력이 강해지자 2011년 대법원은 개혁 요구를 일부 반영해 개선안을 만들었고 올해로 시행 5년째로, 과도기였다. 그런데 양승태 대법원장이 퇴임을 열 달 앞두고 사실상 백지화한 것이다. 판사들은 자신들의 인사 문제라 발언을 주저하고 있으며, 행여 내년 2월 인사에 불이익이 있을까 숨죽이고 있다. 판사들에 대한 청와대의 위협은 외면하면서 이 와중에 제왕적 인사권을 회복했다.

“법관들은 정치권력도 두려워하지 않고 언론권력의 영향도 받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나라 법관은 겁내는 것이 있는데 대법원장의 인사권”이라고 판사들은 말한다.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을 앞두고는 지방법원 부장판사들이 눈치를 보고, 대법관 제청을 앞두고는 고등법원 부장판사들이 움직인다. 제왕적인 대법원장은 무오류의 대법원장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모든 다른 의견들을 소멸시켜가고 있다. 이것이 2016년 겨울의 사법부다.

사회부 이범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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