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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과 만남이 사람 일이라면
상실과 이별도 피할 수 없어
그 연은 깃털처럼 가벼워야지
입춘이 지났지만 아직 새벽 공기는 차가웠어. 난 동트기 전에 일어나 여행 짐을 꾸리느라 종종거렸지. 꼭 먼 길이 아니더라도 길 떠남은 언제나 날 설레게 해. 오늘 가려고 하는 곳은 충북 증평에 있다는 문학창작 공간. 9시쯤이 되자 지난해 뜻밖의 인연이 된 B가 차를 끌고 와 빵빵거렸지. 막상 떠날 생각을 하니 짐이 꽤 될 것 같아 며칠 전부터 은근히 B를 꼬드겨 함께 길을 떠나게 된 것. 아내가 차려준 밥을 한 술씩 떠먹고 길을 나서며 그와 맺어진 만남의 신비에 대해 천천히 곱씹어보았어.
사실 이젠 새로운 인연을 맺는 것에 대해 자꾸 곱송그리게 돼.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잖아. 찰떡궁합 같은 사이도 아주 사소한 일로 금이 가 헤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아. 그렇게 헤어지고 나면 그 상실과 이별의 아픔은 우리를 은결들게 하지. 사랑과 만남이 도상(途上)의 존재인 사람의 일이지만 상실과 이별도 사람의 일. 모름지기 세상의 모든 인연은 변화를 피할 수 없고, 상실과 이별도 피할 수 없지. 그렇다면 그 연(緣)이 깃털처럼 혹은 비눗방울처럼 가벼워야 하지 않을까.
B와의 만남은 부득이했어. 곰살궂을 정도로 청소년을 사랑하는 B가 내가 사는 고장으로 와 청소년을 위한 작은 카페를 열었고, 나도 그 공간에서 작은 교회 공동체를 꾸려가야 했기 때문이지. 처음 B를 대면했을 때 나는 그에게서 싱싱한 야성을 느꼈어. 야성이 느껴지는 사내답게 B는 육체노동을 좋아했지. 땀 흘려 몸으로 터득하는 배움을 소중히 여겼고, 머리만 굴려 아는 지식을 믿지 않았어. 오늘날 컴퓨터 공간에서 얻는 얄팍한 지식으로 뭘 아는 체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야. B는 그런 ‘빌려온 지식’을 경멸했지.
B는 내가 낡은 한옥을 혼자 수리하는 걸 알고 틈날 때마다 와서 기꺼이 땀 흘리기를 자청했어. 불 때는 아궁이를 만들고, 흙과 돌로 담을 쌓고, 겨울 땔감을 마련하는 작업을 할 때도 기꺼이 일벗이 되어주었지. 일 삯 한 푼 없는 힘든 일을 하면서도 마치 놀이를 하듯 여낙낙하게 즐겼어. 그런 B를 보면서 그리스인 조르바가 떠올랐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어머니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라고 명명했던 조르바. 지금이 어떤 시절인데, 조르바를 닮은 이런 대책 없는(!) 사내가 있담? 매사를 구멍가게 주인처럼 주판알로 튕기며 자기 이익을 챙기기 위해 합리적 이성의 노예가 되는 걸 주저하지 않는 시절. 자기 이익에 부합하지 않으면 하늘이 맺어준 소중한 인연도 거두는 냉혹한 시절. 옛사람들이 ‘하늘’을 두려워하며 그 하늘의 신비에 자기들의 삶을 내맡겼던 그런 순천(順天)의 마음을 곰팡스러운 것으로 치부하는 시절. 나는 문득 시 한 편이 생각났어.
“날아오르는 새는 얼마나 무거운지,/ 어떤 무게가 중력을 거스르는지,/ 우리는 가볍게 사랑하자. 기분이 좋아서 나는 너한테 오늘도 지고, 내일도 져야지.// 어쩜 눈이 내리고 있네. 겨울 코트엔 온통 깃털이 묻고,/ 공중에서 죽어가는 새는 중력을 거절하지 않네./ 우리는 죽은 새처럼 말이 없네.// 나는 너를 공기처럼 껴안아야지. 헐거워져서 팔이 빠지고, 헐거워져서 다리가 빠져야지.”(김행숙, <새의 위치> 부분)
여기서 시인은 ‘도법자연’(道法自然)’이란 옛 가르침처럼 새(자연)에게서 자기 존재의 위치를 웅숭깊게 점검하고 있어. 무한경쟁 속에서 무거움에 짓눌려 살아가는 이들에게 ‘가볍게 사랑하자’며 ‘나는 너한테 오늘 지고,/ 내일도 져야지’라는 다짐, ‘나는 너를 공기처럼 껴안아야지. 헐거워져서 팔이 빠지고, 헐거워져서 다리가 빠져야지’라는 시인의 다짐은 자연을 자기 삶의 스승으로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
시의 후반부에 나오는 표현처럼 ‘사람들은 전부 발자국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네./ 춥다, 춥다, 그러면서 땅만 보며 걸어다니’는 시절에, B는 제 발자국을 만들지 않고, 땅만 보며 걷지 않고 늘 자기를 걷게 하시는 하늘을 우러르며 사는 것 같았어.
목적지에 가까이 다가올 무렵 차를 몰던 B는 차창을 열어 바람을 쐬며 중얼거렸어. 형님, 봄이 오고 있어요. 바람이 이젠 달라요. 이 사람아, 봄이 오긴! 아직 도처에 잔설이 허연데…. 길가엔 풀 한 포기 안 보였지만, B는 봄의 전령의 속삭임을 듣기라도 한 듯 자기 속의 느낌을 뜨겁게 토해냈어. 존재에 대한 설렘과 경이를 잃어버린 시대, B의 의식은 시대의 물결을 거스르는 날치처럼 파닥거렸어. 그래, B의 내면에는 ‘작은 아이’가 살아있구나. 우리 안에 ‘아이’가 살아있지 않고서는 경이로운 세계로 들어갈 수는 없고 물질의 세계를 넘어선 형이상의 세계로 여행할 수 없다고 했지.(샘 킨)
길지 않은 여정이었지만, B와 동행할 수 있어서 행복했어. 잠시나마 낯익은 것들과 결별하고, 설렘이 있는 낯선 곳에 머물 수 있게 되어서 말이야. 짐을 다 풀고 한가로이 차 한 잔을 마시고 있을 무렵 B에게서 문자가 왔어. 저 아까 형님 모신 길 말고 옆길로 샜어요 ㅋㅋㅋ. 나도 즉시 답신을 보냈지. 그래, 산길을 가도 옆길로 새야 보물을 캘 수 있지. 꼭 산삼이 아니더라도 향기로운 더덕 한 뿌리라도 캐려면 말이야.
고진하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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