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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대 남성이 돌연사할 확률이 가장 높다는 이 나라에서 ‘중년 남성’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왠지 울적하다. 모든 것을 서열화하고 약육강식의 원리로 쉴새없이 찍어누르는 사회 속에서 알맞게 구겨지고 비굴해진 남자의 씁쓸한 모습. 하지만 그 살찌고 망가진 육체 안에 여전히 풋풋한 ‘소년’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문득 슬퍼진다.

앗, 그런데 그런 그들이 최근 느닷없이 출판계의 새로운 ‘총아’로 떠오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깜짝 놀랐다. 오십대가 되면 감수성이 예민해진 남성들이 여성보다 소설이나 시집 같은 문학책을 더 많이 읽는다는 조사 결과가 발표되고 ‘문학 중년’이라는 말까지 유행하고 있다니…. 매우 센티멘털하게 느껴지는 굿 뉴스여서 오랜 만에 가슴까지 설렜다. 심지어 혼자 신이 났다. 중년 남자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의 리스트를 떠올리며….

제일 먼저 떠오른 이름은 레이먼드 챈들러. 석유회사 부사장 자리까지 올랐지만 ‘자기 내면에서 살고 있던 소년의 불꽃’이 저지른 일련의 실수 때문에 해고당한 후 실업자가 되어 비로소 소설을 썼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단연 첫 번째로 꼽고 싶다. 44세부터 쓰기 시작해서 51세가 돼서야 마침내 첫 장편 소설 <빅 슬립>을 출간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의 대가가 된 그다. 무엇보다 그가 창조한 필립 말로라는 탐정이 너무도 매력적이다. 부패와 탐욕이 들끓는 시대의 욕망과 절망을 추적하는 외롭고 위험한 인물. 냉철하지만 감상적이고, 신랄할 정도로 지성적인 남자. 타락하지 않았기에 언제나 가난했던 패배자. 하지만 그 영혼만큼은 결코 패배할 수 없는…. 그 남자 필립 말로가 등장하는 탐정 소설 <빅 슬립>이나 <안녕, 내 사랑>, 그리고 그를 창조한 레이먼드 챈들러의 창작 비밀이 담긴 에세이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를 함께 추천한다.

두 번째 추천작은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 폴 고갱의 삶을 모델로 한 주인공 스트릭랜드는 마흔에 집을 떠난다. 버젓한 사회적 지위를 지닌 증권 중개인이며 아내와 두 아이까지 거느린 사람이 마흔이 되어 느닷없이 그림을 그리겠다고, 몰인정하게 처자식을 내팽개친다. 그리곤 세상 사람들이 비열하다고 욕해도 본인은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남들 눈에는 ‘승산 없는 도박처럼 보이는 일’이었겠지만 그 자신에게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어떤 진실한 열정이 이끄는 일이었으니까. 천하의 악질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 암처럼 자라고 있던 창조 본능’에 따라 화가가 된 남자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중년이라는 나이가 마치 ‘악의 꽃’처럼 매우 유혹적으로 느껴진다.

한 중년 신사의 독서 삼매경 (출처 : 경향DB)


세 번째는 언젠가 ‘내일이 새로울 수 없으리라는 확실한 예감에 사로잡히는 중년의 가을은 난감하다’고 했던 분에게 추천하고 싶었던 책이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 맞다, 얼마 전 제레미 아이언스가 그 주인공 역을 연기했던 동명의 영화 원작 소설. 라틴어 교사로 조용하고 정돈된 삶을 살던 한 남자가 수업을 하다 말고 ‘그냥’ 떠나버리는 이야기. 심지어 그는 가방조차 챙기지 않았다. 가방을 교실 탁자에 그대로 남겨둔 채 남자는 리스본으로 떠나 버린다. 그의 나이 57세였다. 포르투갈의 한 귀족이 쓴 책에 이끌려 저자가 침묵한 책 속의 비밀들을 파헤쳐 보고자 리스본으로 떠났을 때의 나이가…. 나라는 한 인간을 규정하던 직업, 관계, 도시, 나라 같은 매우 익숙한 것들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는 충동에 종종 목이 멘다면 나이를 떠나 누구에게든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정확히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이런 질문이 나온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아주 작은 것만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게 바로 우리가 문학 작품을 읽는 이유라고 난 생각한다. 그 나머지 세계, 우리가 그 나이가 되도록 미처 경험하지도 생각지도 못했던 세계를 엿보고 새로운 인생, 새로운 나에 대한 전망을 얻고자 하는 중년의 독서 말이다.

누구보다 중년의 위기와 그 가능성에 주목했던 심리학자 칼 융에 의하면 중년은 새로운 중심이 ‘자기’가 될 절호의 타이밍이며, ‘자기로 살아가는 평화’와 ‘변화를 통한 치유’를 모색할 때다. 무엇보다 중년에겐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와 자의든 타의든 경쟁 구도를 떨어져 나가 얼마간 체념한 자의 정신적 여유. 그리고 무엇보다 인생 경험에 의해 폭넓게 확장된 의식과 비전을 가지고 나 자신이 품은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여유 말이다. 그러니 즐겁게 골라 보자. 무슨 책을 읽을지…. 자기계발서는 가련한 청년들에게나 던져주고 이제는 시집이나 소설을 읽을 때라는 거 잊지 마시고.


김경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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