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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 중이었다. 그때 기다리던 전화가 왔다. 한마디도 놓치면 안될 것 같은 매우 중요한 전화였던 터라 자동차를 갓길에 세웠다. “네, 네. 그렇군요.” 안경을 쓴 채 영혼 없이 기계적으로 주판알을 튀기고 있을 것 같은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내 신용등급과 이런저런 부채 내용을 읊었고 나는 그 내용을 야단 맞는 학생 심정으로 듣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외국에서 송금되는 고정적인 수입이 저희 은행으로 들어오고 있어서 심사 과정에서 별 문제가 없으면 마이너스 통장은 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중요한 과정이 하나 남았는데, 혹시 지금 받아 적으실 수 있나요?” 나는 얼른 종이와 펜을 꺼내어 남자가 불러 주는 내용을 받아 적었다. ‘채·무·변·제·능·력·검·증’ 또박또박 적었다. 자신을 ○○은행 스마트뱅킹 대출 담당 심사관이라고 소개한 남자가 불러주는 내용을…. 요는 마이너스 통장을 받으려면 부채 상환 능력을 검증 받아야 하는데 그 내용과 관련해서는 실무 담당자가 다시 전화를 할 거니까 잘 받으라는 내용이었다. 그때부터 또 전화를 기다렸다. 애타는 마음으로….

그로부터 몇 시간 후 실무 담당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매우 퉁명스러웠다. “심사관 하고 통화하셨죠? 그런데 왜 이게 저에게 다시 내려온 거죠?” “아, 글쎄요. 저한테 채무변제능력검증을 받아야 하는데 실무 담당자에게 설명 들으라고 하던데요?” 그리고 또다시 이어지는 기다림의 시간.

저녁 무렵에야 기다리던 전화가 왔고 그 목소리에 하루의 피로가 담겨 있었다.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가장 쉬운 건 저희 은행 계열사 카드사에서 카드론 받으신 다음 바로 상환하는 겁니다. 바로 상환하면 이자는 발생하지 않을 겁니다. 오늘 중으로 받아보신 다음 얼마 나오는지, 이자가 얼마인가 저에게 알려주세요. 그 금액과 이자율에 따라 마이너스 통장 액수와 금리가 달라지거든요. 전화 번호 아시죠? S은행 스마트뱅킹 센터 1599-3576으로 전화하신 다음 1번 누르시면 됩니다.”

바보가 아니라면 그때 알아야만 했다. 중국 어디쯤에 있는 남자가 지금 돈이 필요한 한 멍청한 여자를 상대로 ‘보이스 피싱’ 중이라는 걸…. “참 눈 가리고 아웅 식이네요. 채무변제능력검증이라는 게….” 내가 약간 어이가 없다는 듯 그렇게 묻자 남자가 대답했다. “계열사지만 실적 때문에 사실 경쟁관계에 있거든요. 그래서 이런 편법을 쓰기도 하는데 그 사실에 대해선 그쪽 카드사 담당자에게는 말씀하시면 안됩니다.” 세상에, 나 바보 맞다. 남자의 말을 들으며 요즘은 은행원들도 실적 때문에 야근을 하는구나, 하며 짠한 마음까지 들었으니…. 심지어 12.90%로 스피드론 1200만원을 받은 후 남자에게 득달같이 전화해서 알려줬다. 금액과 이자가 얼마나 나왔는지….

낚시의 묘미는 물고기와의 여유 있는 줄다리기라고 했던가? 남자는 다음날까지 계속 내 애간장을 태우며 기다리게 했다. 저녁 일곱 시 넘어 전화한 남자는 마이너스 통장이 3500만원까지 나왔으며 이자는 4.20%라고 했다. 남자는 그 희소식을 전하며 받은 카드론은 오늘 밤 중으로 상환해야 한다면서 카드사 야간콜센터 전화번호를 가르쳐줬다. 야간콜센터 남자에게서 상환을 위한 가상계좌번호를 받는 순간 알았다. 지금 남자의 낚시찌가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다는 사실을…. 남자는 낚시를 낚아챌 만반의 준비를 하며 미소짓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불현듯 하찮은 용량이긴 하지만 내게도 두뇌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물고기가 여유 있게 “그럼 계속 수고하세요”라는 말을 남기고는 유유히 몸을 뺐다.

정말 무서웠던 건 남자가 내 남편에게 사과를 받아야겠다며 그날 밤 세 번, 네 번, 다섯 번 계속 전화했다는 사실이다. 112에 ‘보이스 피싱 미수 사고’를 신고한 후 남편이 남자에게 전화해서 한바탕 욕을 퍼부은 직후였다. 그의 뻔뻔함에 몸이 떨려 왔다. 남편은 마지못해 사과했다.

보이지 않는 어둠의 전화, 보이스 피싱 (출처 : 경향DB)


사과는 내가 편해지기 위해서 하는 것만이 아니다. 상대에게 용서를 구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내 어리석음과 게으름 때문에 매우 치밀하게 일을 꾸민 남자가 무려 이틀 동안이나 헛공을 들였다. 그 점 사과한다. 진심으로 미안하다. “돈이 필요하시면 은행에 가세요. 제 발로 은행에 가는 수고 정도는 하셔야죠. 전화로 모르는 사람이 내 편리를 봐준다고 하면 100프로 다 사기라는 거 잊지 마시고요.” 내 전화를 받은 112 담당 형사는 그렇게 훈계했다. 그의 말이 맞다. 우리의 신용정보는 대부분 다 털렸다. 그 신용정보 안에 당신을 낚아챌 수 있는 미끼의 내용이 담겨 있다. 편리할수록 의심하시라. 전화는 안된다. 그보다는 우리의 발이 더 믿을 만하다.


김경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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