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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가는 서울행. 옷장 앞에서 잠시 서성댄다. 뭘 입을까? <너라는 우주에 나를 부치다>라는 첫 소설을 낸 저자로서 인터뷰를 해야 하는 처지라 가능하면 그 처지에 맞게 입고 싶었다. 실패한 연애를 하도 많이 해서 되레 천진해진 여자가 진짜 사랑을 찾아 겁도 없이 전진하는 로맨스 소설이니 원피스를 입어야 하지 않을까? 기왕이면 밝고 산뜻하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걸로? 그런 생각으로 이것저것 입어본다.

그런데 이상하게 다 내키지 않는다. 그냥 평소 가장 즐겨 입는 청바지에 맨투맨 티셔츠를 입고 그 위에 최소한의 격식을 부여하는 의미에서 두툼한 회색 재킷을 걸쳤다. 그리곤 늦가을 일교차를 고려하여 사파리 코트를 하나 더 입을까 하다가 짐을 줄이는 차원에서 코트 대신 엄마가 짜 준 털목도리로 대신했다. 좋았다. 뭔가 애쓰고 있다는 느낌이 전혀 없는 것이 나 스스로 편안했다. 심지어 무언가에 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느낌마저 드는 것이….

어쩌면 트렌드를 좀 의식했는지도 모르겠다. 놈코어(normcore)라는 신조어와 스티브 잡스라는 대표 아이콘을 앞세워 ‘일상적 평범함을 추구하는 패션이 무엇보다 더 스타일리시한 시대가 됐다’는 소식이 초고속 인터넷선이 안 깔린 나의 적막한 산골 마을에까지 전파된 요즘이다. 개 짖는 소리와 함께 요란하게 나타나지만 기껏 해봐야 신용카드 청구서만 가져다주는 우체부 아저씨 대하듯 어떤 트렌드이든 오면 오고 가면 가는가 보다 했지만 놈코어만큼 어딘지 좀 반가운 구석이 있었다. 베블런이 제기한 유행론의 핵심, 나와 다른 사람을 구별 짓기 위한 패션에 무심한 이들의 ‘반트렌드적 트렌드’가 바로 놈코어가 아닌가 싶어서…. 그리고 무엇보다 “놈코어는 ‘다르지 않음’에서 오는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태도”라 했던 뉴욕의 트렌드 예측 회사 케이-홀(K-Hole)의 설명에 이상하게 마음이 동요되고 있던 차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마을 입구 가게 앞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내 손엔 방금 끊은 분홍색 버스표가 들려 있다. 하루에 다섯 번밖에 없는 서울 가는 버스표. 그 버스표를 손에 쥐기 위해서는 누구나 ‘백운상회’ 할머니가 조금도 서두르는 기색 없이 느긋하게 앉아 돋보기를 쓰고 손으로 날짜를 적어주는 모습을 지켜보며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한다. 처음엔 답답했지만 어느새 그 리듬에 익숙해진 나는 할머니와 이런저런 한담을 나누며 내가 속한 시골 공동체의 아우라를 느낀다. 이제는 그 느낌이 내 몸에 잘 맞는 데님 팬츠처럼 편안하게 애틋하다.

패션 잡지에 있는 놈코어 패션


‘뉴욕 매거진’ 표현대로라면 놈코어는 ‘자신이 전 세계 70억 인구 중 하나임을 깨달은 사람들을 위한 패션’이다. 그런 차림으로 버스에 오른 나는 괜히 설레는 마음으로 가방에서 책을 꺼낸다. <당신의 서쪽에서>. 뒤늦게 제주의 서쪽에 꽂힌 탁현민이 한동안 그곳에 내려가서 생계형 한량 낚시꾼처럼 살며 쓴 제주 찬가 에세이다.

잘 읽혔다. 제주를 사랑하게 됨으로써 스스로 좀 더 아름다워진 기분이 든다는 마흔 줄의 남자 이야기가…. 심지어 애틋해서 매만지듯 읽었다. 그러다 몇몇 대목들을 읽으며 깜짝 놀라고 말았다.

“너를 사랑하게 됨으로써 내가 좀 더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건 서로에게 보내는 최고의 찬사이며 가장 뜨거운 고백이다.” “누구든 자기가 선택한 것을 보며 살게 된다. 나는 이제 다만 아름다운 것만을 보려 한다. 어떻게든, 그렇게 살고 싶다.”

그건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다. 아름답다고 느낀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면서 서울을 떠나간 여자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며…. 아, 그랬구나. 이 사람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구나. 대체 불가능한 어떤 특별한 한 사람, 어떤 특별한 한 장소에게 느끼는 사랑 이야기를 서로 다른 형식의 책으로 구현했지만 우리가 느끼는 분노와 좌절, 무기력, 해법은 결국 비슷한 것이구나, 생각했다.

탁현민은 “유토피아란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라고 썼지만 난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는 것”이라는 표현을 덧붙이고 싶다. 그건 아름다움이다. 그건 사랑이고 또 행복이다. SNS를 열면, TV를 켜면, 뉴스에 접속하면 우리를 한없이 무기력하고 하찮은 존재로 만드는 이 세상을 우리 모두 함께 살고 있다. 하지만 살아가야만 한다. 서로 독려해야만 한다. 우리 각자 계속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갈 수 있도록. 누군가에게 열광하고 무언가에 아름다움을 느끼며 계속 사랑하고 창조할 수 있도록.

날씨가 점점 추워지고 있다. 어두운 밤의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지고 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나는 우리 모두가 “함께 있다”고 느낀다. 가방에 책이 두 권 더 있다. 표준을 뜻하는 ‘norm’과 핵심을 뜻하는 ‘core’의 합성어 놈코어를 처음 사용한 SF 대가 윌리엄 깁슨의 책 <뉴로맨서>와 평범한 부부의 매우 비범한 여행기 <한 달에 한 도시>. 트렌드와 SNS는 흘러간다. 하지만 책은 내 가방 안에 있다. 든든하다. 행복하다.


김경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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