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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ㆍ“우물쭈물하는 사람을 희극의 힘으로 한 발짝 나가게 할 것”

지난해 밀양연극제에서 민족극 계열인 ‘정의로운 천하극단 걸판’의 <그와 그녀의 옷장>이 대상과 연출상을 받은 것을 두고 미디어는 ‘이변’이라 표현했다. 그게 이변이라면 시작은 지난해 봄 걸판 단원 오세혁의 <아빠들의 소꿉놀이>와 <크리스마스에 삼십만원을 만날 확률>이 신춘문예 희곡부문에 동시 당선된 것부터일 것이다. <그와 그녀의 옷장> 역시 오세혁 작품이다. 그러나 정작 오세혁은 그런 소란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 작품이 고단한 사람들에게 위로와 작은 용기를 주는가에만 온통 정신이 팔려 있다.

김규항=자신을 오플린이라 부를 만큼 채플린을 좋아하는데요.

오세혁=어릴 때 채플린 영화를 보는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을 포착해내는 걸 보고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김규항=어릴 때 채플린 영화를 보며 그런 걸 보다니 유별났네요.

오세혁=배경이 있는데요. 어릴 때 부모님과 떨어져서 할머니 집에서 좀 살았거든요. 초등학교 1학년 어버이날에 어머니가 오셨어요. 그런데 어머니랑 잠깐 나갔다 온 사이에 할머니가 낙상으로 돌아가셨어요. 엄마랑 이모들이 난리가 났죠. 그런데 이제 서둘러 장례식장으로 가야 하는데 엄마랑 이모들이 막 울면서도 거울을 보며 단장을 하는 거예요. 드라이하고 얼굴에 분도 바르고. 그게 너무나 우스워서 막 웃었어요. 엄청 맞았죠(웃음). 그런데 그때 느낀 게 있었던 것 같아요. 사람이 웃길 때만 웃는 게 아니라 진지하거나 심각할 때도 사람이기 때문에 어떤 빈틈이 생길 때가 있거든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죠. 그런데 좀 더 지나서 채플린 영화를 보는데 바로 그런 걸 그리더라고요.

 

연극인 오세혁 ㅣ 출처:경향DB

김규항=채플린도 그랬지만 희극을 하는 사람들은 현실이 희극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아요. 슬픔을 아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슬픔을 치유할 수 있지요.

오세혁=저 역시 그렇고요. <그와 그녀의 옷장>을 기륭전자 노동자들이 보고는 정말 고맙다고 했습니다. 주변에서 우리 이야기를 작품으로 만들면 힘들게만 그려놔서 가뜩이나 힘든데 그걸 보고 있으면 더 힘들다. 우리 이야기를 재미있고 아름답게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극단 걸판의 목표가 ‘가장 의미있는 일을 가장 재미있게’이기도 합니다.

김규항=세간의 표현을 빌리면 ‘작년 이후 제도권 연극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인 극작가이자 연출가’입니다.

오세혁=어쩌다 그렇게 되어버렸습니다. 비정규직 문제나 강정마을 이야기 같은 건 걸판에서 책임감을 느끼고 해야 하는 거죠. 그런데 저는 개인적인 이야기나 가족 이야기 같은 것도 하고 싶었거든요. 그걸 신춘문예에 내본 건데 생각지도 않게 동시 당선이 되었죠.

김규항=제도 연극계에서 작업하고 활동할 기회가 많아졌는데 어떤가요.

오세혁=고마운 경험이고 공부도 되었지만 가장 큰 소득은 걸판 활동이 저에게 가장 큰 기쁨과 보람을 준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한 겁니다. 걸판에서 자유롭게 시도할 수 있는 게 많고 제 작품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게 걸판 식구들이고.

김규항=작품이 매우 쉬우면서도 캐릭터 묘사에 희한한 구석이 있어서 연출자와 소통이 쉽진 않을 것도 같아요.

오세혁=제가 당연한 이야기를 당연하게 하는 걸 참 좋아하는데요. 이를테면 노동자들이 싸움을 위해 다 모여 있는데 ‘왜 다 모여 있는 거야. 혹시 힘을 합쳐서 뭔가 하자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한다든가, 어떤 조합원이 ‘내가 가겠습니다’ 그러면 ‘불과 5분 사이에 노동자 의식이 급성장했구나!’ 한다든가. 그런데 다른 연출가들은 대본을 보고 이게 뭐지 싶으니까 빼버리기도 합니다(웃음).

김규항=걸판은 안산의 지역극단이고 현장 공연을 위주로 활동해왔습니다. 단원들에게 주류 연극계에 대한 심리적인 불편 같은 건 없었나요.

오세혁=저나 김태현, 최현미 같은 창단 멤버들은 목적을 갖고 시작했으니 그렇지 않았는데요. 그냥 연극을 하려고 들어온 사람들은 걸판이 대학로 공연을 안 하는 것에 대해 은연중에 그런 게 있었던 것 같아요. 심지어 현장에서 저희를 부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경우가 있었고요.

김규항=지난해 밀양연극제에서 대상을 받은 게 도움이 되었겠군요.

오세혁=밀양연극제에 나간 이유이기도 했어요. 우리 작품을 제도권 연극제에 올려 관객들에게 인정받는 모습을 보고 싶었죠.

김규항=격찬을 받았고 ‘오세혁이라는 천재의 발견’이라는 기사도 나왔죠(웃음). 그런데 걸판의 김태현씨는 “세혁이더러 천재라고 하는데 세혁이가 얼마나 노력하는 사람인지 몰라서 하는 말”이라고 적었더군요.

오세혁=제가 유일하게 자부하는 게 노력입니다. 처음 몇 년 동안 연기는 안 하는 게 어떠냐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고 극본도 쓴다고 썼지만 늘 부끄러운 수준이었어요. 극복하려고 많이 보고 많이 읽고 많이 쓰고. 주변에 뛰어난 사람들이 워낙 많기도 하지만, 노력파인 주제에 목표를 채플린으로 잡아놔서 더 힘들죠. <모던 타임즈> 같은 작품을 생각하면 잠도 안 와요(웃음).

김규항=선생 작품엔 ‘사람이란 게 다 비슷하다’는 시각이 있어요. 특별한 건 그게 냉소나 회의가 아니라 새로운 힘을 만들어냅니다.

오세혁=장기투쟁하는 젊은 여성노동자들이 조끼를 늘 입고 있는 걸 보면 예쁘게 차려입고 싶을 텐데 조끼가 지겹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파업하는 중년의 건설노동자들이 술 취한 모습 보면 용역들이 무서워서 저런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고요. 거꾸로도 많이 보는 것 같아요. 비정규직 이야기를 할 때는 용역깡패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광주항쟁 이야기를 할 때는 시민군보다는 진압군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는 식이죠.

김규항=사실 특별한 행동이 있을 뿐 특별한 사람이란 없죠. 평범한 속성과 이면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용기도 내고 함께 일어서고 하면서 특별한 행동이 만들어지는 거죠.

오세혁=말씀대로 사람은 다 그렇잖아요. 뭔가를 하려고는 하는데 겁이 나거나 소심하거나 우물쭈물하거나. 연극의 시작이라고도 하는 원시 동굴벽화도 짐승이 무서우니까 그림을 그려 용기를 낸 거잖아요. 같이 이렇게 찌르면 된다고. 지금 그 짐승이 지배체제일 수도 있고 자본일 수도 있지만 항상 시작은 그런 것 같아요. 제 작품이 하는 일은 우물쭈물하는 사람들에게 ‘그래도 한 발짝 나갈 수 있지 않겠냐’ ‘어떻게 될진 모르겠지만 한번 힘을 내보자’ 말하는 거죠.

김규항=현장의 반응이 생생하겠군요.

오세혁=연극을 난생처음 본다는 중년의 금속노조 노동자가 “이걸 보니까 내가 한동안 안이하게 산 것 같다. 다시 한번 힘을 내서 싸워보고 싶다”고 말하기도 하고요. 여성 청소노동자가 대기실에 들어와서 1만원짜리 한 장을 주시면서 우셔요. ‘나도 노동자라서 그렇다’면서. 아직은 사회문제에 대해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소중한 순간들이죠.

김규항=지금 현실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작은 용기를 만들어주는 것보다 깊이 있는 이야기가 있을까요. 기륭전자 투쟁 노동자들은 민주노동당이 국민참여당과 통합할 때 반대하고 탈당했을 만큼 급진적인 사람들이잖아요. 물론 노동자로서 상식적인 선택을 했을 뿐이지만 근래 한국에선 그런 상식도 교조주의니까요(웃음). 그럼 사람들이 고맙다고 했다면 깊이 있는 이야기 맞습니다(웃음). 근래 걸판엔 ‘민족극과 대학로 제도 연극계를 아우르는’이라는 수사가 붙곤 합니다.

오세혁=저희도 그렇지만 보면 민족극 계열과 대학로가 서로를 닮아가고 있는 것도 같아요. 사회적인 이야기들을 대학로에서 많이 하고 있어요. 용산참사 이야기도 대학로 작가가 제일 먼저 했거든요. 민족극 계열은 예전엔 노동이나 통일 같은 금기시되는 소재를 다루는 것만으로 통했는데 이젠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게 되니 좀 더 예술적인 노력이 필요해졌다고 할까요.

김규항=1990년대 이후 오랜 시간에 걸쳐 민중연극이나 문화운동 쪽 청년들이 대학로에 진출한 흔적일 수도 있겠군요. 연극하면 먹고살기 어렵다는 건 다들 하는 이야기인데 걸판은 어떤가요.

오세혁=연극하는 사람은 돈 벌려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은 건데요. 그게 쉽진 않죠. 가장 큰 문제가 집 문제고 이따금 큰일 생겼을 때 곤란하죠. 그런 면에서 걸판은 참 좋습니다. 고정 급여를 받고 단원 숙소도 있고 밥도 같이 먹으니까요. 연극 꿈을 가진 청년들에게 입단을 권합니다(웃음).

김규항=상업극을 하는 것도 아니고 운영과 운동성을 동시에 가진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요.

오세혁=창단부터 8년 동안 대표를 맡아온 김태현 형의 기여가 큽니다. 지난해에 공연을 148회 했는데 그 중 3분의 2 정도가 집회나 농성장 같은 현장 공연이었습니다. 현장 공연은 공연비를 조금 받거나 거의 안 받거나 하지만 그 감흥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죠.

김규항=아우구스토 보알의 활동이 떠오릅니다.

오세혁=보알 선생을 좋아하는데 이유는 하나입니다. “관객 스스로가 연극의 주인공이 되게 하자. 그러려면 관객이 연극을 직접 해야 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연극이 없는 이들에게 연극을 나누어주기 위해’ 어디든 달려갔다는 거죠. 빈민가, 오지, 정글,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지역. 그곳에 가서 그들에게 난생처음으로 연극을 보여주고, 또 처음으로 연극을 할 수 있게 만들고. 걸판도 그런 활동을 지향합니다.

김규항=보알은 희극 전문은 아니었죠(웃음). 한가한 논평가들은 슬랩스틱 코미디가 유행하면 스탠딩 코미디를 상찬하고 스탠딩이 유행하면 슬랩스틱을 상찬하기도 해요.

오세혁=슬랩스틱은 몸으로 느끼는 웃음이고 스탠딩은 머리로 느끼는 웃음인데 저는 두 가지를 모두 쓰는 것을 좋아해요. 작품의 인물들이 우스꽝스럽게 자빠지고 구르고 날고 뒹굴면서 관객의 몸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동시에 쉴 새 없이 재치가 넘치는 말을 뒤집고 비틀고 꼬아서 관객의 머리를 자극시켜 주는 걸 좋아합니다.

김규항=현장 밖의 대중, 오늘 한국의 거리에서 만나는 시민들은 어떤가요. 한 예술가의 관점에서.

오세혁=다들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아요. 뭔가에 꽂혀 있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단계랄까요. 게임에 꽂혀 있건 <나꼼수>에 꽂혀 있건 안철수에 꽂혀 있건. 이명박 욕하기에 꽂혀 있건. 요즘엔 밤에 시내를 못 나가겠더라고요. 술들 많이 먹는데 기분 좋게 취한 사람들은 거의 없고 너무나 악에 받친 모습이랄까, 건드리면 처참하게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이랄까.

김규항=시장이라는 게 무섭긴 무서워요. 군사독재 시절에도 사람들이 최소한의 꼴은 유지했잖아요. 이웃 간의 정도 있고 너무 탐욕을 부리면 죄를 받는다는 생각도 했고. 그런데 그런 게 시장 원리로 재편되고 도무지 자기 존중을 유지할 방법은 없고 말씀대로 뭔가에 꽂혀 있지 않으면 살 수가 없죠.

오세혁=6학년짜리 조카가 너무 게임을 많이 해서 게임이 재미있는 거지만 너무 많이 하진 말라고 했더니 그러더군요. ‘재미로 하는 게 아니다. 내가 세상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해봤는데 나는 어른이 되어도 잘살 가능성이 없다. 이미 다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런데 온라인게임 세계에는 아직 평등이 있다. 열심히 하면 이 세계 안에서는 레벨을 올리고 남부럽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다.’

김규항=어릴 적 제 삼촌만큼이나 유별난 아이군요(웃음). 문제는 그 아이 말이 전적으로 사실이라는 거죠.

오세혁=쿠바에 농업 견학 갔던 농민들이 땡볕에 일하는 쿠바 청년에게 꿈이 뭐냐고 물었는데 ‘지금처럼 농부로 살아가는 거’라고 해서 울었다고 해요. 한국에서 살아가기 힘든 이유는 쿠바보다 가난해서가 아니라 노동이 나를 행복하게 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김규항=우리는 오랫동안 ‘노동의 건강함’을 이야기해왔지요. 그런데 이젠 노동이라는 것 자체에 대해 생각해야 할 세상이 된 것 같아요. 일은 더 이상 세상을 유지하고 세상에 필요한 걸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극소수 지배자들의 이윤을 만들어내는 도구가 되어버렸지요. 노동이 세상을 파괴하고 오염시키고 필요하지 않은 걸 필요한 것처럼 만들어냅니다. 이론으로는 막막하지만 예술의 힘으로, 특히 희극의 힘으로 시원하게 드러내주길 기대합니다.

오세혁=세계의 본질을 해석할 수 없다면 우물쭈물하는 사람을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게 할 수도 없을 겁니다. 희극의 힘으로 해보겠습니다(웃음).

※극단 걸판은 13일부터 29일까지 <그와 그녀의 옷장>을 공연한다. 대학로 게릴라극장. 010-8356-8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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