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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법원의 예언자였을까. “한 고위 법관은 ‘양 후보자가 조직 장악력이 뛰어나 사법행정을 통해 재판에 영향을 줄 우려도 있다’고 말했다”(한겨레 2011년 8월19일자). ‘양 후보자’는 기사 게재 전날 대법원장으로 지명된 양승태 변호사를 가리킨다. 우려는 적중했다. 이제 양승태라는 이름 뒤에는 사법농단이란 문구가 따라다닌다.

그런데 사법농단이 적확한 표현일까. 군이 적을 향해 겨눠야 할 총부리를 시민에게 돌렸다면? 군사쿠데타라 부른다. 법관이 사실과 증거 대신 권력의 입맛에 따라 재판을 했거나 계획을 세웠다면? 사법쿠데타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심한 표현이라는 시각이 있겠다. 사람이 죽었다. 양승태 대법원이 1·2심 판결을 깨고 KTX 승무원들의 복직 길을 막아서자 세 살배기 딸을 둔 해고자가 목숨을 끊었다. 양승태 대법원이 2심 판결을 깨고 “쌍용차 정리해고가 정당하다”고 판결한 이후 노동자 5명이 세상을 떴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8년7월27일 (출처:경향신문DB)

국군기무사령부의 ‘계엄령 문건’ 진상규명을 위해 군·검 합동수사단이 구성됐다. 시민은 국회 국방위원회를 통해 기무사의 실상을 목격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세 차례나 문건 관련 메시지를 내놓았다. 양승태 사법농단을 두고도 검찰 수사팀이 꾸려지긴 했다. 그뿐이다. 대법관과 법원장들은 태연히 재판거래 의혹을 부인한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수사 협조를 약속했으나, 자료를 내놔야 할 법원행정처는 요지부동이다. 양승태 체제에 순치된 일부 판사들은 사실상 ‘관선변호인’ 노릇을 하고 있다. 국회는 법사위를 열었지만 안철상 행정처장의 “재판거래를 인정할 정황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답변을 듣는 데 그쳤다. 청와대는 언급을 삼간다. 삼권분립이란 헌법정신 때문이다.

법원은 이를 틈타 치외법권지대가 되어가고 있다. 최근 사법농단 수사팀은 17건의 압수수색영장(e메일 보전조치 영장 포함)을 청구했다. 발부된 것은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에 대한 2건뿐이다. 발부율은 11.76%다. 지난 1~6월 서울중앙지법의 압수수색영장 발부율은 80.85%(법원통계월보)였다.

기각 이유를 살펴보자. 현직 대법관 연루 정황까지 제기된 부산 법조비리 은폐 의혹 사례다. 검찰은 행정처 윤리감사관실·인사심의관실 및 문모 전 판사의 사무실, 현기환 전 정무수석(구속 중)의 구치소 등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청구했다. 법원은 ①윤리감사관실의 경우 “임의제출 가능성”이 있고 ②인사심의관실 자료는 “국가 중대 이익과 관련된 공무상 비밀에 해당할 여지”가 있으며 ③문 전 판사 건은 “별건수사”이고 ④현 전 수석 수감실은 “증거물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없다”며 기각했다. 그러나 ①행정처는 윤리감사관실 자료 제출 계획이 없다고 밝혔으며 ②법관 인사자료를 내준다고 국익이 훼손된다는 건 논리적 근거가 약하다. ③과 ④는 더 군색하다. ③절도범 쫓다가 살인범 목격하면 외면해야 하나. ④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구치소에 대한 압수수색은 왜 허락했나.

양승태 체제를 옹호하는 일부 법관들은 시민의 합리적 의심을 일축한다. 우리가 위법이 아니라면 아닌 거다, 우리는 사법발전을 위해 노력한 것뿐이다…. 양 전 대법원장이 상고법원(대법원 상고심 사건 중 단순한 사건만 별도로 맡는 법원) 도입에 욕심을 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뿐이 아니었다. 검찰이 확보한 문건들을 보면, 양승태 대법원은 ‘법관의 해외공관 파견’과 ‘고위 법관의 외국 방문 시 의전’ 같은 사안까지 알뜰히 챙긴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행정처의 재판개입 시도가 상고법원 도입이라는 사법정책적 목표 외에 극소수 엘리트 판사들의 ‘복지 증진’ 차원에서도 이뤄졌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낯부끄러워서라도 법복을 벗어던지는 고위 법관 한 사람쯤 나와야 옳다. 과도한 기대인가.

재판거래 의혹의 피해자인 김승하 철도노조 KTX열차승무지부장은 “수사 대상자들이 법원에 남아 스스로를 변호하는 상황”이라고 비판했다. 김 지부장의 말처럼 피의자 혹은 잠재적 피의자들이 수사를 방해하는 상황을 더 이상은 용납할 수 없다. 영장심사는 물론 기소 후 재판 과정에서도 공정성을 담보할 장치가 절실하다.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은 사법농단 책임자 처벌과 피해자 구제를 위한 법안 2건을 발의할 예정이다. 전자는 시민사회가 참여하는 추천위원회를 설치해 여기서 추천된 판사들로 ‘특별재판부’를 구성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후자는 재심사유를 확대해 사법농단 피해자들이 구제받을 길을 넓혀주는 법안이다. 이제 국회가 적극 나서 신속하게 입법해야 한다. 법원은 현대판 ‘소도(蘇塗·삼한시대 죄인이 도피해도 잡지 않았던 신성지역)’가 아니다.

<김민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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