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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시장의 ‘불출마 선언’이 아쉽다. 그의 기자회견문을 몇 번이고 읽어보았지만 이유를 모르겠다. ‘국민의 마음을 사지 못했다’는 것이 설명의 전부다. 그가 얻고 있는 지지율이 낮기 때문에 포기하겠다는 말이다. 그게 정말이라면 참 안타깝다.

그는 이 나라를 제대로 세우기 위해 나서겠다고 했다. 자신이 실현하고 싶은 가치가 있다는 얘기도 했고, 자신만이 그것을 이룰 수 있다는 각오도 밝혔다. 그런데 시작도 하지 않은 시점에서 지지율이 낮아 주저앉겠다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박 시장은 지지율이 높건 낮건 그만의 독특한 빛깔과 목소리를 계속 내야 했다. 그것은 지도자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의무이다.

박 시장이 하차했기 때문에 더불어민주당 후보 진용에 심각한 결손이 생겼다. 그것은 박 시장의 지지율과 견줄 수 없는 큰 구멍이다. 그레고리 헨더슨이 ‘대한민국 그 자체’라고도 한 서울특별시를 이끈 값진 경험, 협치와 혁신의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가 민주당 후보 경쟁 과정에 계속 참여했더라면 민주당의 확장성과 역동성에 큰 도움이 되었을 텐데라는 미련을 버릴 수 없다.

더불어민주당 대선주자인 김부겸 의원(오른쪽)과 박원순 서울시장이 지난 17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발언 순서를 양보하고 있다. 두 주자는 야권에 의한 ‘정권교체와 공동정부·공동경선’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양측은 야3당이 연합해 개방형 공동경선을 치를 것을 제안했다. 강윤중 기자

박 시장의 느닷없는 하차는 정치지도자 본인을 위해서도, 민주당의 승리를 위해서도 좋은 일은 아닌 것 같다. 박 시장이 왜 저렇게 황망히 떠났을까, 그를 붙들어둘 수는 없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꼬리를 문다.

박 시장의 하차를 애석하게 여기다가 주변을 돌아보니 김부겸이 눈에 밟힌다. 박 시장의 행보를 지켜보며 김부겸도 고민이 많을 것이다. 자신의 지역구 경기도 군포를 버리고 민주당의 ‘동토(凍土)’ 대구로 달려가 깃발을 꽂은 김부겸은 그 여세를 몰아 정권교체의 선봉에 서겠다고 했다. 그런데 지지율이 좀처럼 오르지 않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대선후보 여론조사표에서 그의 이름이 사라져 버렸다. 김부겸의 마음이 어떨지 짐작이 간다. 민주당 주류의 대표 후보와 어쭙잖게 겨루려다 ‘18원짜리 후원금’으로 조롱을 받은 일이야 병가지상사라 하더라도 지하로 내려간 지지율은 참기 어려운 수모일 것이다.

그런데 민주당의 승리를 위해서는 김부겸이 레이스를 포기하면 안된다. 그는 문재인, 이재명, 안희정이 가지고 있지 않은 덕목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부겸은 대구·경북의 ‘총아’다. 그는 민주당 간판으로 30여년 만에 대구·경북 출신 국회의원이 되었다. 지역주의의 어두운 장막에 바늘 같은 빛줄기를 만들었다. 김대중의 동진정책, 노무현의 전국정당화정책을 이어받아 그가 단기필마로 이룬 성과다. 이번 대선에서 김부겸이 감당해야 할 몫은 여전히 크다. 지난번 대선에서 민주당은 대구·경북에서 200만표가량을 졌는데 이번에 그 차이의 절반은 따라붙여야 민주당이 전국적으로 승리할 수 있다. 그동안 한나라당에서 넘어와 정체성이 어리바리하다고 무시당하고, 진보적 입장 그 자체를 우월감으로 여기는 민주당 주류의 철없는 구박을 견디면서도 대구·경북에서 빛바랜 민주당 깃발을 굳세게 지켜온 김부겸에게 희망을 걸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민주당원들은 김부겸이 포기하지 않도록 성원을 해야 한다. 민주당의 승리를 위해서 그렇다. 김부겸은 문재인처럼 내로라하는 정치 혈통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이재명처럼 결기가 넘치는 것도 아니며, 안희정처럼 스마트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만큼 정치적 사려(prudence)가 깊은 지도자는 없다. 그는 1980년 봄,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 연설의 주인공이라는 신화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신중하다. 그가 내세우는 상생의 정치, 공존의 공화국이라는 비전은 가장 김부겸다운 메시지다. 그는 ‘나를 따르라’라는 지도자가 아니다. 그는 양떼를 뒤에서 밀고 가는 목동의 리더십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것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지도자 만델라의 리더십에 비견하고 싶다. 이런 리더십이야말로 민주당의 확장성과 역동성, 그리고 민주진보세력의 통합에 중요한 기여를 할 것이다.

민주당 대선후보 경쟁이 뜨거워지고 있는 즈음에 김부겸을 격려하자는 이런 ‘위험한’ 제안을 마음 놓고 하는 이유는 사실 그가 꼴찌를 벗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민주당에 김부겸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가치만큼 필요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라는 판단 때문이다. 이런 제안이 김부겸에게는 좀 미안하다.

대선후보 여론조사표에서 이름이 사라진 김부겸에게 ‘모멸을 삼켜라’, 민주당의 승리를 위해 ‘포기하지 말라’는 요구가 그에게 얼마나 ‘가혹한’ 것인가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민주당의 승리를 위해서는 이 꼴찌에게 갈채를 보내야 한다. ‘18원짜리 후원’이 아닌 제대로 된 후원을 해야 한다.

김태일 | 영남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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