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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의 경험으로 어떤 사람을 평가하곤 한다. 그 경험이 유쾌하지 않을 경우 기억이 더 오래 남는다. 사람을 성급하게 평가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판단이 쉽게 바뀌지 않을 때가 있다.

10여년 전이다. 지금은 기획재정부로 이름이 바뀐 재정경제부에 출입할 때의 일이다. 어떤 자리에서 높은 분 옆에 앉아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낮은 출산율에 대한 얘기가 오갔다. 내가 말했다. “애들 키우는 데 돈이 너무 많이 드는 것 같아요. 다들 애 낳기를 무서워하는 듯해요.” 그분은 쏘아붙이듯 대답했다. “애들한테 돈 쓰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요. 나도 지금까지 돈 벌어서 애들한테 다 썼어요. 돈이 없어 애 못 낳는다는 게 말이 되나요.”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내가 못할 말이라도 했던 것일까…. 그분은 한국 최고라는 대학을 나와서 고시를 통과해 높은 자리에 올랐다. 환갑을 넘긴 지금도 금융기관단체의 회장을 맡고 있다. 그분이 자녀를 키우느라 얼마를 썼는지는 몰라도, 많은 사람들이 내 생각에 동의할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기획재정부의 높은 분들은 ‘남들의 사정은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바뀌지 않는다.

얼마 전 한 분이 내 생각을 더 굳게 만들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다. 최 부총리는 “전세 사는 설움을 아느냐”는 야당 의원의 질문에 “나도 지역구에서 전세 살고 있다”고 답했다. 최 부총리는 서울 서초구의 10억원 가까운 아파트를 포함해 45억여원의 재산을 가졌다고 한다. 국회의원에 출마하기 위해 지역구에 전셋집을 얻기는 했겠지만, ‘전세 사는 설움’에 대해 왈가왈부할 입장은 아닌 것 같다.

전세자금 대출 (출처 : 경향DB)


요즘 젊은 세대는 참 살기 힘들다고 한다. 치열한 입시경쟁을 뚫고, 겨우 대학에 들어가도 아르바이트와 스펙 쌓기로 자신을 뒤돌아볼 여유도 없다고 한다. 어렵게 스펙을 쌓아도 괜찮은 직장에, 정규직으로 들어가기는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 경쟁에서 살아남은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비정규직으로, 얼마 되지 않는 돈을 벌며 연애는커녕 자기 한 몸 챙기기도 벅차다고 한다.

최근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20대 후반의 한 후배는 말했다. “며칠 전 ‘30대 후반 남성 중 절반이 미혼 상태’라는 기사를 썼어요. 정말 상황이 심각한 것 같아요.”

50대의 한 선배는 말했다. “딸이 곧 대학을 졸업하는데, 취직하기 힘들 것 같아.” 내가 말했다. “결혼을 하면 취직을 안 해도 되지 않나요.” 동료가 말했다. “취직을 해야 결혼을 하지.” 아, 그렇구나. 요즘은 맞벌이가 기본이구나.

요즘 젊은이들이 사는 세상은 며칠 전 본 영화 <인터스텔라> 속의 지구 같다. 거대한 황사바람이 수시로 일어나고, 비는 내리지 않는다. 병해충이 농사를 망쳐버리기 일쑤다. 숨이 막혀 죽고, 굶어 죽을 것 같다. 탈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취직을 못하니 결혼을 못하고, 결혼을 못하니 아이도 낳지 못한다.

이러다가는 정말 나라의 존립이 위험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보건복지부에서 높은 분이 나섰다. “싱글세 같은 페널티 정책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돈이 없어 결혼도 못하는데, 세금까지 내라는 말이냐”는 여론의 비난에 복지부는 한동안 곤욕을 치렀다.

이번에는 다시 기획재정부가 나섰다. “정규직에 대한 과보호로 기업이 겁이 나서 사람을 못 뽑는다. 노동시장 개혁이 필요하다”고. 정리해고를 쉽게 하는 ‘쉬운 해고’도 곧 추진할 듯하다.

그나마 결혼하고, 아이 낳던 정규직마저 언제 잘릴지 모르게 만들겠다고? <인터스텔라> 속 주인공은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건다. 기획재정부도 그만큼 절박하게 고민하고 있을까.


김석 비즈 n 라이프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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