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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창 | 고려대 명예교수



 

지난달 19일 제네바 유엔 군축회의에서 북의 대표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남에 대하여 “최종적인 파괴”를 말하였다는 보도가 있었다. 핵폭탄 등의 대량파괴 무기가 말하여질 때에는, 대체로 전쟁 억제, 평화 수호와 관련하여 그것이 언급되는 것이 오늘의 세계 대세라고 할 것인데, 북은 그것을 전쟁 수단으로 활용할 의도를 단호하게 선언한 것이다. 


고 송욱 선생의 1950~1960년대의 생활고를 이야기하는 시에, 죽음에 임박한 여인이, 이승의 삶도 이미 저승의 삶과 다름이 없다고 하면서, “이승에서도 원자탄 그늘처럼/ 미안하고 불안하게 살아왔다”고 하는 대목이 있다. 이 시가 나왔을 때, 이 시의 풍자적 리얼리즘에 공감하면서도, “원자탄의 그늘” 아래 사는 것 같다는 표현은 조금 과장된 느낌이 들었었다. 그러나 이제 나라의 부는 크게 늘어났다고 하겠지만 , “원자탄의 그늘”은 현실이 되었다.



국내외에서 최근에 나오는 북핵에 대한 여러 설명 가운데,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의 아시아 정치 담당 편집국장인 페터 슈투름의 분석의 장점은 사건의 맥락을 간단, 명료하게 밝혀준다는 것이다. 이에 의하면, 북은 핵을 포기해야 할 이유가 없다. 핵실험을 통해 여러 나라를 놀라게 한 것 그 자체가 북한의 소득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북한은 다른 나라의 주목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핵으로 인해 동북아 지역이 불안정한 곳이 된다고 해도 그것은 북에 관심사가 되지 않는다. 무역이나 외교 관계에서 외부 세계와의 관계가 많지 않은 상태에서 고립의 심화도 별로 고통스러울 것이 없다. 강요된 고립은 열악한 인민의 경제에 대한 책임을 외세에 전가할 구실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체제의 정당성을 높여준다. “다수의 적”에 맞서는 당당한 “자존심” 또는 “명예의식”을 보여주면서 외부에서 오는 압력 일체를 거부하는 주권 수호가 북의 정치 행동의 지침이다.

북한 군인들이 3차 핵실험 성공 축하집회 (경향신문DB)


북한은 독자적인 자신의 논리를 따라 움직인다. 대부분의 나라가 갈등을 피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오늘의 정상 국가라고 한다면, 북한은 갈등에서 이점을 얻어내는 특이한 국가이다. 갈등을 도발하면 양보해야 할 한계 지점을 알게 된다. 6자회담은 상대방의 기본 입장을 확인하는 기회이다. 그것으로 미국과의 전쟁 위험은 계산할 필요가 없는 것이 된다.


북의 전쟁 능력은 어떻게 볼 것인가? 하나의 관점은 취약한 경제에 비추어 전쟁 가능성을 크게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북은 정치 지도부, 군 그리고 인민--이 세 부분이 독립된 경제 구역을 가지고 있다. “독립된 별(行星)”에 존재하는 군 경제는 다른 어떤 부분보다 강하여 독자적인 군사지원 능력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결론은 경제력 전체가 뒷받침하지 못하는 전쟁이 오래 계속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전쟁의 현실적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러나 핵과 그것으로 조성되는 불안이 해결돼야 할 지상과제임에는 변함이 없다. 


긴급 사태에 대한 대비가 없을 수는 없지만, 하나의 필요는 더 넓은 관점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다. 슈투름 국장의 분석과 같은 것은 그것을 위한 시발점이 될 수 있다. 되풀이하건대, 그것은 오늘의 현실 논리를 분명하게 밝혀준다. 핵 개발은 북의 입장에서 볼 때, 국내적으로나 국외적으로 실질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그리고 다시 그쪽의 관점에서는, 그것은 완전한 이념적 정당성을 갖는다. 그 주요 부분은 외부 세력의 간섭을 거부하는 주권 확립이라는 명제이다. 강력한 주권의 주장이 제국주의적 외세로부터 체제와 민족의 정통성을 지키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핵개발 전술을 정당화한다. 


마키아벨리즘은 흔히 폭력과 사사로운 이익을 자의적으로 조종하는 정치 술법을 말한다. 그러나 피상적인 마키아벨리즘의 이해가 놓치는 것은 비합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술수에 궁극적인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 엄숙한 정치적 이념 또는 이상이라는 점이다. 여러 외국 전문가들의 관찰은 상호관계의 굴곡에 따라 들고남이 있기는 했지만, 핵개발은 북의 기본 정책으로 그 근본적 포기는 당초부터 기대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북핵 문제의 이해에 중요한 부분의 하나는 그 이념적 논리이다. 사람의 삶이 하나의 이념으로 승화될 수 있다는 생각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호소력을 갖는다. 그러나 삶의 진리는 많은 경우 삶 전체에 흩어져 존재한다. 2차 대전 후 반핵 운동에 헌신한 버트런드 러셀은 핵전쟁의 위협에 당면해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에서 상대방을 핵전쟁을 통해서라도 타도돼야 할 악마의 체제라고 하는 주장들이 있었지만, 그는 이 대결에서 패배의 굴욕을 받아들이면서라도 인류 전체의 생존을 도모하는 것이 옳다고 했다. 많은 전통에서 집단 이상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가장 숭고한 인간 행위로 간주된다. 이에 대조하여, 러셀의 주장은 비열하고 허무주의적인 선택을 권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념을 초월해 사람의 삶에 널리 흩어져 있는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면서 생명의 존엄성과 가능성과 신비를 최대의 가치로 긍정한다.


그러나 하나이면서 여럿인 진실을 어떻게 현실이 되게 할 것인가? 필요한 것은 역설적으로 삶의 진실의 분산을 공동으로 수용할 수 있는 제도들을 만드는 것이다. 문제의 국제적 분산은 그것을 위한 한 주요한 통로가 될 수 있다. 슈투름은 그의 다른 글에서 동아시아 지역의 큰 약점으로 국가 간의 갈등을 조정하고 공동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지역적 구조”가 없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그리하여 중요한 국가 간의 의제는--독도, 조어도, 쿠릴열도, 과거 청산 등의 문제에서 볼 수 있듯이--국내의 정치 투쟁과 민족주의 열풍에 휩쓸려 너무 쉽게 갈등의 원인으로 전락한다.


 2차 대전 이후의 유럽의 진화를 볼 때, 이 점에서 아시아 지역의 후진성은 부정할 수 없다. 북핵과 관련한 6자회담과 같은 것은 문제를 지역의 테두리에 삽입하려는 노력이었다고 할 수 있으나, 절실한 것은 보다 다양한 의제와 접근을 허용하는 기구이다. 의제도 삶의 진실 위에 다양하게 분산돼야 한다. 그것이 공동 의식을 만들어낸다. 동서 냉전의 종결에 헬싱키 협약(1975)과 같은 것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더러 지적된다. 미·소 등 동서 진영의 여러 국가는 이 협약에서 동서 간 긴장완화의 필요에 동의했다. 최종 규약은, 주권과 영토 존중, 국제간 분규의 평화적 해결 이외에 인권, 자유권, 사상과 신앙의 자유에 대한 합의를 포함했다. 사람들은 이것이 결국은 공산 세계의 민권 운동과 붕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체코의 바츨라프 하벨의 민주화 운동의 출발점도 여기에 있다.) 이것을 말하는 것은 이러한 붕괴의 가능성을 생각하자는 것이 아니라 정치 체제를 넘어 인간의 기본적인 존재 방식--집단만이 아니라 개인들의 권리를 위한 윤리적 호소가 필요하다는 것을 지적하자는 것이다. 동아시아 지역에 참으로 뜻있는 협력기구가 존재하려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체제를 넘어 인간의 인간됨에 대한 공동의식을 전제할 수 있어야 한다. 북·미 간 차원에서 좋은 증후들이 일어나고 있다. 며칠 전에는 중국의 지식인 120여명이 전국인민대표회의와 인민정치협상회의에 유엔 국제인권규약의 비준을 촉구하는 서한을 전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것은 인권규약의 시민적 정치적 권리를 말하고, “중국이 인권, 개인의 자유와 위엄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전체 사회가 야만과 증오의 사회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우려한다”고 하였다.(경향 2월28일자)


체제적 이념이나 민족주의적 요구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이념들은 남북대결의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데에 너무 좁은 바탕이 된다고 아니할 수 없다. 문제를 보다 넓은 국제적 복합 관계 그리고 보다 넓은 인간적 관심의 지평으로 열어 놓는 방도를 찾는 것은 요원하면서도 궁극적인 해결의 한 길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이러한 논의의 테두리들을 구축하는 것이 쉬운 일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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