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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창 | 이화여대 석좌교수
최근 미국에 있었던 큰 사건은 코네티컷 주 뉴타운에 있었던 총기 난사 사건이다. 우리 신문들에도 보도된 바와 같이, 이것은 20세의 한 청년이 초등학교에 침입하여 20명의 어린이와 6명의 교사 등을 살해한 사건이다. 범인은 학교에 침입하기 전 집에서 어머니를 살해하였고 자신도 자살로 사건을 마감하였다. 이것은 미국의 사건이면서, 우리 모두의 인간관을 어둡게 하는 일이기도 하고, 우리 사회를 포함하여, 어떤 종류의 인간 공동체 이념 그리고 민주주의의 의미에 대하여 새로운 반성을 요구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비슷한 사건으로 우리나라에서 크게 보도되었던 것은 2007년 버지니아공대에 재학 중이던 한국계 학생 조승희의 총기 난사로 32명이 살해되고 많은 사람들이 부상한 사건이었다. 미국의 각급 학교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총기사건은 드문 일이 아니다. 전체적으로 미국에서 각종 총기에 의한 살인은 연평균 3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러한 일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볼 때, 이것은 우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그 원인이 사회 자체에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미국 버지니아 공과대학 교내 총격사건 5주년 추모행사 (출처 :경향DB)
이번 사건은 다시 미국에서 총기 소유 문제를 국가적인 의제가 되게 하였다. 사건 직후 15만명이 청원서에 서명하여 무기 문제에 대한 논의를 촉구하였고 오바마 대통령은 20여개의 행정명령을 발하여 총기 판매를 규제하는 조처를 취하였다. 그리고 다시 총기 판매와 소유 제한을 새로 규정하는 법안을 의회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이 법안이 통과될 것인가 아닌가 그 전망은 분명치 않다. 간단하게 찾을 수 있는 이유로 총기 제조와 판매로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는 무기업자들의 로비와 공화당의 많은 의원을 비롯한 보수정치인들의 반대가 말하여진다. 무기 소유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라는 것이 이들이 내거는 명분이다.
정치적 법률적인 문제를 떠나서 이번 사건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이 나오고 있다. 제일 쉬운 설명은 범행 청년이 정신 장애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를 알았던 사람들은 그가 사람들과 교섭을 싫어하는 비사교적인 성품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비교적 얌전하고 공부도 잘하는 학생이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보다 넓은 차원에서의 하나의 설명은 이번 사건이 미국의 문화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지의 한 논평자는 미국의 한 사학자 견해를 인용하면서, 이번 사건의 원인이 미국사회의 “군사화”에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우려를 표현하였던, “군과 기업의 유착관계”, 계속되는 미국의 해외 전쟁, 국민들 사이에 일반화된 군사 애국주의, 영화나 컴퓨터 게임에서의 전쟁 살인 놀이--이러한 것들이 전체적으로 미국의 문화와 일반적 심리를 “군사화”한 결과 청소년이 자신의 문제를 총기와 폭력으로 해결하고자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평에 추가하여 생각할 것은 민주주의 이념 자체에도 그러한 군사주의를 배태할 요인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보수주의 정치 여론이 무기 소유를 규정한 헌법 조항을 들고 나오는 것은 반드시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헌법 조항은 국민의 자기 방위권--자위권을 규정한 것이다. 이것은 외국의 침략에 대항해 국민이 민병대를 조직하고 국토를 방위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지만, 개인이나 집단이 타자에 대해 스스로를 방위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건국 초의 사정 또는 그 이전의 인민 자위권의 역사를 생각할 때, 이것은 국가에 대한 인민의 저항권을 규정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무기 보유는 미국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다. 민병대 의무를 갖는 국민 모두가 무기를 자기 집에 보관하는 스위스는 그 대표적인 예이고, 캐나다나 노르웨이도 무기 소유가 자유화되어 있다.) 넓게 살펴 볼 때, 개인의 무기 소유와 자기 방위의 권리가 국민 또는 인민의 자위권에 포함된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특이한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는 데에 기초한다. 미국의 무기에 대한 헌법규정은 헌법 전체의 맥락에서 시민의 권리 규정의 일부로서 존재한다. 그런데 각자의 권리란 결국 각자의 생명과 행복 또는 이익을 방어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물론 그것은 일정한 법질서 속에서만 가능하다. 한 사람의 생명권 또는 행복추구의 권리는 다른 사람의 권리와 갈등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개인적 이해관계, 그 갈등과 타협을 불가피한 사회 현실로 인정한다. (하나의 국가 목표에 모든 사람이 승복할 것을 요구하는 전체주의와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 현실만이 제도의 정신적 기반이 될 때, 그 사회는 곧 비인간적인 사회로 전락할 위험을 갖는다. 모든 인간사가 결국 힘의 대결 그리고 그 균형과 타협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만을 원리로 하는 국제관계나 개인적인 심리가 “군사화”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앞에 언급한 독일의 논평자는 뉴턴 초등학교 총기난사와 같은 사건을 유발하는 심리적 동기를 설명하면서, 그 배경이 된 것은 세계의 모든 갈등과 증오와 원한과 소외가 총으로 해결될 수 있고 그로 인해 자신과 자신의 세계가 파멸에 이르게 되는 것도 상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하는 문화라고 말한다. 그렇게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자신이 생각하는 정당성을 위해서는 투쟁과 승리만이 목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단순화된 민주주의의 이념에 함축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사회적 화해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생명과 행복을 인정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여 타협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이기 때문인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시대의 철학자 마르실리오 피치노는 남녀 간의 사랑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랑의 대상을 이상화하기 때문인데, 그것을 통해 그 사람은 자신 안에 있는 이상적 가능성, 즉 자기 안의 영혼의 존재에 대하여서도 깨달음을 얻게 된다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사랑은 사람으로 하여금 주어진 대로의 삶을 넘어서 플라톤적 이상의 세계에로 향하게 하는 매개체가 된다. 비슷한 전환은 사회관계에서도 볼 수 있다. 정상적인 사회에서 다른 사람과의 타협은 단순히 이해관계의 타협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개인을 넘어선 사회적 유대감의 중요성은 우리가 자주 듣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흔히 이익의 집단화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사회관계를 진정으로 매개하는 것은 이해관계를 넘어 생명의 신성함에 대한 인정 그리고 보편적 윤리 세계에 대한 동참이다. 그리하여 사회적 화해는 인간존재의 이상적 가능성에 대한 열림으로 승화될 기회가 된다. 이러한 열림에 맞닿아 있음으로써 민주주의는 참으로 인간성 실현의 이상이 된다. 그러나 이익사회에서 상실되는 것은 사람과 사람, 더 나아가 사람과 환경의 일치의 가능성에 대한 이러한 느낌이다.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다행이지만, 오늘의 우리 사회에 이러한 높은 차원의 인간 이해가 존재할 자리가 있는 것일까? 모든 것을 개인과 집단의 이익 차원에서만 보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학교 교육에서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은 없고, 모든 것은, 개인이나 국가 이익을 위한, “스펙” 쌓기 경쟁이 된다. 새 정부의, 총리 후보자 검증에 대한 여러 논의들을 보면서 놀라게 되는 것은 그것을 도덕적 윤리적 문제로 간주하기보다는, 또 사회가 지켜 나가야 할 도덕적 투명성 문제로 보기보다는, 출사(出仕)에 요구되는 경력 관리, 이미지 관리의 문제로 보는 관점이 많다는 사실이다. 명분이야 어떤 이름으로 이야기되든, 인간의 모든 행동을 이익과 전략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오늘의 문화적 상식이다. 그리고 정신적 존재로서의 인간--그러면서 너무나 쉽게 유혹에 빠지는 정신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이해는 사라졌고, 물론 자비, 용서, 화해, 선의, 예의, 겸허, 검소 등 부드러운 덕성들은 감상주의의 부질없는 언술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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