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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 일가의 국정농단 의혹으로 대한민국 전체가 허탈감에 빠졌다. ‘김영란법’ 시행으로 교사는 제자가 주는 캔커피조차 부담스럽고 공무원들은 지인과의 일상적인 만남도 기피하는 상황이었다. 공적 영역을 뛰어넘는 초법적인 세계가 실재하고 있었음이 확인되면서 평범한 국민들의 분노와 상실감은 더욱 커져 간다. ‘한국은 샤머니즘이 지배하는 나라’라는 외신 보도가 이어지면서 국가 이미지는 추락하고 국제적으로 망신살이 뻗쳤다.

한식 세계화 사업을 위해 대기업으로부터 거액을 지원받은 미르재단의 설립 취지가 무색해졌다. 최순실의 권력이 독버섯처럼 확장되었던 음습한 공간들은 ‘잘나가는’ 강남 사모님의 일상생활 세계, 그들의 권력 공간과 묘하게 겹친다.

언론에 등장하는 최순실의 주요 활동 무대는 강남 사모님의 마법이 시작되는 소비 공간이다. 카페, 레스토랑, 명품숍, 피부 마사지를 받는 사우나에서 호스트바까지. 일부 부유층 여성들끼리 정보를 교환하고 친밀한 관계를 맺는 사교의 장소이자 외모를 가꾸고 화려하게 치장하는 뷰티 공간인 것이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정권 초기 한국의 주요 언론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단정한 외모와 패션 외교를 칭송했다. 패셔니스타 최순실이 골라준 세련된 옷들이 신통한 효력을 발휘한 것이다. 어디 대통령뿐이랴? 최순실의 마법은 한국 사회에 팽배한 외모지상주의, 명품 소비시장과 결합되어 더욱 강력해졌다. ‘예쁘면 모든 게 용서되는’ ‘미모가 곧 권력’인 한국에서 여성 정치인들은 피부 마사지를 받고 세련된 외모를 유지하느라 고달픈 서민들의 삶과는 자꾸 멀어져 간다.

이제는 초등학교 여교사들조차 예뻐야 학생들이 좋아한다며 방학 때면 성형수술을 받고 외모 가꾸기에 열중한다. 책보다는 옷과 화장품을 사고 도서관보다는 피부과를 찾는 게 한국 여성들의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실력과 배짱으로 독일을 이끄는 여성 지도자 앙겔라 메르켈 총리도 한국에 오면 촌스러운 아줌마로 조롱의 대상이 되었을 것 같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이화여대마저 최순실의 마법이 통하는 무대로 전락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여자대학이라는 위상에 걸맞지 않게 대학가 앞에는 서점 대신 뷰티·소비공간만 즐비하다.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이대 졸업생들의 존재감은 공적 공간보다는 사적 공간에서 더 위력적이다.

한국의 고학력 전업주부들은 스스로 노력해서 자신의 꿈을 이루는 좁은 길을 선택하기 보다는 막강한 재력과 정보력을 무기로 자녀와 남편을 뒤에서 조종해 억눌린 욕망을 실현하는 방식을 더 선호하는 것 같다.

실제로 요즘 강남에는 엄마가 시키는 대로 옷 입고 진학하고 취업하고 결혼하는 ‘아바타’ 같은 젊은이들 천지다. 집 밖에서는 멀쩡한 대장부인데 부인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고 꼬리를 내리는 생쥐 같은 가장도 의외로 많다. 종교의 힘을 빌려서라도 현세의 부귀영화를 대대손손 누리기를 원하는 일부 강남 사모님들에게 최순실은 최고의 멘토일 수 있다. 재산을 눈덩이처럼 불리고 대학입시 규칙을 바꾸고 국정까지 좌우하는 신묘한 마법의 소유자이니 말이다.

최순실 일가가 수천억원대의 재산을 형성하게 된 배경은 1980년대 강남 빌딩 매입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부동산 거래를 통해 막대한 재산을 순식간에 형성할 수 있었던 어수선한 시절, 강남은 복부인을 위한 ‘대박의 땅’이었다. 쉽게 번 돈은 고급 외제차, 명품 옷·가방 구입에 쓰였고, 자녀들의 사교육과 결혼시장으로 흘러갔다.

돈으로 거의 모든 걸 살 수 있는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녀의 결혼은 강남 사모님의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젊은 판·검사를 강남 아파트와 고가의 혼수로 유혹해 사위로 삼으면 미래의 고위공무원이 저절로 내 가족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내 딸도 커서 나처럼 판사 부인이 되면 정말 좋겠다’는 강남 사모님의 솔직한 고백은 애교에 가깝다. 지방의 가난한 집안 출신 검사가 초고속 승진을 하고 권력을 행사하려면 처가의 든든한 경제력이 필수라는 자조적인 농담 속에서 그녀들은 국가 권력마저 소리 없이 장악해 왔다.

재테크에 밝은 최순실은 국내외 승마장과 동계스포츠 관련 이권에도 주목했다. 실제로 최순실 일가는 동계올림픽 개발 호재를 놓치지 않고 평창 일대 부동산에까지 손을 뻗쳤다. 수십억원에 달하는 말을 구입해야 하는 승마, 장비구입과 빙상시설 이용으로 돈이 많이 드는 동계 스포츠 종목들은 일반인들이 넘볼 수 없는 특권층의 공간이 되기 쉽다. 외동딸의 승마 전지훈련을 지원하기 위해 독일에 거처를 마련하고 K스포츠재단을 통해 해외 진출까지 모색한 최순실의 지리적 상상력은 끝없이 확장 중이었다.

자, 이제 우리 모두 최순실의 마법에서 깨어날 때다. 막대한 돈과 권력을 가졌으나 공식적으로는 무직자이기에 더 자유롭게 활동 영역을 넓혀갈 수 있었던 최순실 세력의 허상을 깨닫고 ‘강남 사모님 공화국’의 실체를 직시하자. 프라다 신발, 명품가방 부러워하면 지는 거다. 어둠 속에 가려 있던 부패의 커넥션이 적나라하게 세상에 드러났으니 진짜 개혁을 시작할 기회가 왔다.

김이재 지리학자·경인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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