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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박근혜 대통령이 국빈으로 이란을 방문했을 때 히잡의 일종인 ‘루사리’를 착용해 화제가 되었다. ‘기독교계가 대통령을 탄핵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상대국의 문화를 존중하고 경제적 실리를 챙기기 위한 패션외교로 인정되어 너그럽게 넘어갔다. 우리는 히잡을 여성 억압의 도구로만 보는 서구식 관점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만 사실 히잡에 대한 관용도는 나라마다 다르다. 프랑스에서는 무슬림 여성들에게 공공장소에서 히잡을 벗으라고 강제해 갈등을 키웠지만, 개인의 종교적 자유를 중시하는 영국에서는 무슬림 여성이 어디서든 히잡을 착용할 수 있다. 그 결과 중동의 부호가 소유한 헤롯 백화점뿐 아니라 런던의 고급 쇼핑가에는 히잡을 쓴 관광객들이 넘쳐난다.단정한 외모가 취업과 결혼을 위한 핵심적인 경쟁력이 되는 한국에서는 피부 관리와 메이크업이 평범한 여성들에게조차 당연한 일상적 의무로 다가온다.

머리 손질 안 하고 화장기 없는 맨 얼굴로 집 밖에 나가려면 게으른 여성으로 찍힐(비난받을)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보수적인 가정에서 자라 ‘여성은 예쁘고 늘 조신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심했던 내가 자유롭게 된 계기는 유럽 배낭여행이었다. 여성들이 각자 자신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가꾸는 사회에서는 뼈를 깎는 고통과 부작용을 수반하는 성형수술과 다이어트가 무의미해진다. 특히 100년 전부터 여성 참정권 운동이 활발했던 영국은 제인 구달, 도린 매시, 애니타 로딕, 비비언 웨스트우드 등 씩씩한 여성 선배들 천지였다. 통통한 몸매에 소박한 옷차림으로 BBC 뉴스를 전하는 털털한 아줌마 앵커부터 헬멧 쓰고 자전거로 출근하다보니 메이크업은커녕 헝클어진 머리가 자연스러운 여교수까지…. 외모가 아닌 실력으로 승부하는 영국 여성들을 보면서 나도 조금씩 용기와 자신감을 기를 수 있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매주 세계 곳곳의 다양한 문화와 자연환경을 보여주는 <세계테마기행>은 EBS의 인기 프로그램이지만 여성 출연자는 희소하다. 제3세계 오지의 열악한 환경에서 촬영이 타이트하게 진행되다 보니 돌발적인 변수와 위기상황이 수시로 발생한다. 육체적으로 고된 일정인 데다 숙소 등 추가 비용이 발생하니 제작사로서는 여성출연자가 여러 가지로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메이크업은커녕 물이 없어 제대로 먹지도 씻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냥 카메라 앞에 서야 하는 여성 출연자 역시 ‘예쁘게 보이고 싶은’ 욕심을 버려야 한다. ‘주인공은 내가 아니고 현지 주민들이니 나는 망가져도 괜찮아’라거나 ‘아무리 힘들어도 내가 기본은 해야 여성 후배들이 더 많이 출연할 수 있겠지’ 하는 사명감으로 현장에서 버티다보니 단골 출연자가 되었는데, 흥미로운 것은 가장 후줄근하게 나온 동아프리카편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응이 가장 뜨거웠다는 점이다. 1편 촬영지인 빅토리아 폭포 가는 도중에 가방을 통째로 잃어버려 단벌의 티셔츠로 끝까지 버텨야 하는 최악의 여정이었는데, 남성 시청자들의 팬레터가 학과 사무실로 날아들었다. 특히 탄자니아 사막 한가운데 있는 죽음의 화산을 1박2일 기어서 오르느라 땀과 눈물, 화산재로 범벅인 얼굴에 반했다고 하니…. 나의 연구지역인 동남아에서는 여성의 외모에 대한 시선이 서구보다도 더 진보적이고 관용적이다. 세계에서 무슬림 신자가 가장 많다는 인도네시아에서 히잡 착용은 여성 개인의 선택사항이다. 여성 혼자 운전도 못하게 하는 사우디아라비아나 9세 이상의 여성은 모두 히잡을 착용해야 하는 이란과는 다른 분위기다. 여성이 자발적으로 착용하는 히잡은 무슬림으로서 자부심을 표현하고 여성의 상품화에 저항하는 무기가 된다. 나도 기독교 신자지만 동남아 현지의 이슬람 행사에 참석할 때는 히잡을 준비해 상대를 배려한다. 분주한 아침 히잡은 한국에서 온 워킹맘의 시간을 절약해주는 마법의 날개가 되기도 한다. 히잡을 쓰면 흰머리 염색도 필요 없고 방사선 치료로 머리카락을 잃은 암 환우의 스트레스도 줄여주니 나름 착한 패션이다.

박 대통령도 비상시에는 올림머리 대신 히잡을 두르는 기지를 발휘할 수는 없었을까? 익숙한 헤어스타일을 확 바꾸거나 종교적 의미가 강한 히잡을 쓰는 게 부담스럽다면 모자나 가발도 괜찮지 않을까? 여성들이 마음에 드는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 출근해도 되는 직장문화를 시도해 보는 건 어떨까? 앞으로는 지혜와 연륜을 상징하는 주름과 흰머리를 당당하게 드러내는 여성 앵커와 지도자를 TV에서 자주 볼 수 있게 되면 좋겠다.


▶지리 꿀팁

획일적인 서구식 미인대회에 저항하여 여성의 아름다움을 다양한 기준으로 평가하는 국제적인 무슬림 미인대회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처음 개최되었다. 지난 11월 말에는 미스 USA 미네소타 지역 예선에서 ‘노출이 심한 비키니’ 대신 ‘신체를 가리는 부르키니’ 수영복을 입은 소말리아 난민 출신의 당찬 무슬림 여대생까지 등장했다. 미스 유니버스에게 ‘돼지 같다. 살 좀 빼라’고 폭언하고 성차별적 표현과 무슬림 비하 발언을 남발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미국에서도 여러 편견에 도전하는 여성들의 발랄한 저항이 시도되고 있다.

김이재 문화지리학자·경인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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