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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기 후반, 내가 소설을 쓰기 전부터 언론에 가끔 등장하는 대사들이 있었다. “그건 딱 한마디로 하자면 소설 같은 이야기다.” “허무맹랑한 소설이다, 완전한 창작이다.”

대부분 비리나 비위, 위법행위의 의혹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고급 양복을 입고 마이크 앞에 나타나 기자에게 답을 하는 형식으로 이런 말을 쏟아냈다. 소설을 쓰지 않던 시절에도 나는 소설가들이 그들의 언명대로 뜬구름 잡는 방식으로 허황하게 소설을 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도 소설의 독자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궁지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허구(거짓)’를 도구로 삼는 소설을 끌어다 자신들이 ‘진실’하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겠지만, 그 말을 듣는 소설가들이 기분이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소설가도 공·사석에서 그런 표현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는 걸 본 적이 없다. 대꾸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서든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일소에 붙였든 간에. 남들이 하지 않는 객쩍은 일을 하는 게 새삼스러운 일이 아닌 내가 이제 다른 소설가들을 대신해 그들이 느끼고 있을 소회를 말해보고 싶다.

‘소설’이란 무엇인가? 인문대학 국문과 강의 시간에도 요즘은 잘 나오지 않을 고답적 질문이다. 소설에 관한 정의를 간단히 말하자면 ‘(작은) 이야기’다. 작지만 대단히 신축성이 뛰어난 이 자루에는 세상사와 우주만물, 인류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인간의 오욕칠정이 담겼다 비워지고 또 담길 수 있다. 소설의 구성물질은 문자이고 문장으로 운영되며 필자·편집자·독자가 기본적인 생산, 유통구조를 이루고 있다. 대체로 허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허구를 통해 진리가 아니고 교훈, 교리가 아닌 진실, 부분적 필연성을 드러낸다.

실제로는 없는 일(허구)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이 설득력이 없으면 소설이 성립되지 않는다. 설득력은 개연성에서 나온다. 소설의 개연성은 실체적 진실만큼이나 단단하고 보편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소설은 제대로 된 소설이라고 할 수 없고 극단적으로 말해 자의적인 문장의 나열, 감정의 배설에 불과할 뿐이다.

“소설 쓰고 있다”는 말을 입에 자주 담는 사람은 그와 대구를 이루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라, 내가 바보가 아니라면 그런 일을 할 이유가 있겠는가”라는 말도 반드시 하게 되어 있다. 이 역시 소설의 개연성을 의식하는 말이다. 독자로 하여금 자신이 쓴 소설의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을 하게 만들려는 삼류의 작의(作意)가 들어 있는 것 같은데, 그런 것에 넘어갈 독자는 많지 않다. 특히 자신의 주머니에서 꺼낸 돈을 지불하고 소설책을 사본 사람이라면 아예 그런 ‘쓰레기 같은’ 소설은 살 생각도 하지 않는다. 대개의 경우, 그 사람이 말하는 상식은 맞지 않고, 그는 바보가 아닌데도 그런 행위(불법, 범법, 비리 등)를 저지른 것으로 드러난다.

소설가의 입장에서 볼 때 마음에 들지 않는 표현은 한두 번으로 그치지 않는다. 도저히 어쩔 수 없이 사태가 불리하게 돌아가면 ‘(국민의 뜻, 사법기관의 판단을) 무겁게 받아들인다’, ‘개인적 부덕의 소치’, ‘불찰(不察)’이라는 판에 박힌 소리들이 흘러나온다. ‘민심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내게 잘못이 있음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반성한다’는 것을 에둘러 피해가는 수사에 불과하다.

‘부덕의 소치’는 왕조시대의 군주가 가뭄과 홍수 같은 천재지변을 당했을 때 신하들을 모아 놓고 ‘할 수 있는 만큼 해봤지만 애초에 내가 덕(운, 재수)이 없는 걸, 타고난 걸 어쩌겠느냐’는 책임회피용 언사이다. 불찰? 내 잘못이 아니고 주변이 범죄를 저질렀을 뿐 자신은 잘 몰랐다는 뜻이다. 소설에 가져다 쓰기에 턱없이 부실한, 썼다가는 욕 먹기 딱 알맞은 문장이다.

소설은 소설 나름의 치열한 검증을 거쳐 작품이 된다. 가장 먼저 초고를 쓴 작가 자신이 ‘이 정도면 되겠다’고 인지할 때까지 혹독한 교정으로 완성도를 높이는 과정이 있다.

그것이 최초의 독자(다른 작가의 작품을 많이 접해본 편집자 같은 전문가)의 교열, 수정을 거쳐 출판사 내부의 일정한 검증기준을 통과한다. 그러고 난 뒤에 가장 까다로운 시장(다수의 불특정 독자)의 선택을 받아야 한다. 한 점에 수백만원에서 수십억원을 호가하는 그림과 달리 다수의 독자가 향유하는 소설책은 민주적(?)으로 저렴하다. 소설책은 자비출판이 아닌 바에야 선거철에 우후죽순 격으로 나오는 정치인의 수필집처럼 쉽게 출판되는 것도 아니고, 시장성이 없으면 곧바로 퇴출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 작품이 아무리 좋아도 시운이 맞지 않으면 작가의 생애 내내 묻혀 있을 수도 있다.

이처럼 격렬하고 무자비한 전장이 소설의 세계인데 자신의 곤경을 모면하기 위해 툭하면 ‘소설 같은 이야기’라고 쉽게 말하는 사람이라면 이때까지 제대로 된 소설을 한 권도 읽지 않았거나 전혀 읽을 마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확언할 수 있다.

혹 그들이 나중에 국민의 피 같은 세금으로 운영되는 담장 높은 시설에 수용이 된다면 마침내 제대로 된 소설을 찾아 읽게 될지도 모른다. 책장을 덮고 나서 허벅지를 치며 지난날 자신이 말한 ‘소설 같은 이야기’의 그 ‘소설’이 얼마나 엉터리였는지 돌아보며 쥐구멍을 찾게 될 것이다.

소설이란 무엇인가. 사전적 정의로는 ‘사실 또는 작가의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허구적으로 이야기를 꾸며나간 산문체의 문학양식’이다. 명백히 자신의 잘못이라고 드러난 일을 ‘소설 같은 이야기’라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사람이라면 앞으로 뭐가 되든, 어디로 가서든 소설은 쓰지 말 것을 권한다. 더불어 ‘만화 같은 이야기’ 같은 표현으로 다른 사람의 신성한 직업을 모독하지 말 것을 경고한다.

굳이 변명을 하고 싶으면 자신들의 세계에 빗대어서 표현을 하면 된다. ‘그건 제가 뽑았던 대통령의 어록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입니다’ 하는 식으로. 가장 좋기는 구차하게 변명하지 말고 입도 열지 않는 것이다. 그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국민은 충분히 힘들고 지겨우며 생업에 막대한 지장까지 받고 있으니까.

성석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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