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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 새로 생긴 작은 책방에서 독자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을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동네 작은 책방들이 많아지면 그중에 내 단골 책방도 생길 텐데, 그러면 책 고르는 일이 훨씬 즐겁고 편해질 것 같다고. 말하자면, 내 취향의 옷들을 파는 작은 옷가게처럼. 언제 들러도 내가 좋아하는 옷이 한두 벌쯤은 있어서 지갑 형편상 사지는 못하더라도 그저 구경만으로도 행복한. 동네 책방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 책방에 들르면 내가 좋아하는 취향의 책들이 가지런히 놓여있고, 그중에 무얼 골라도 크게 실망할 것 같지 않은. 그러니까 책방에 대한 믿음, 주인에 대한 믿음, 선택에 대한 믿음, 그런 것들이 총체적으로, 그러나 거창하지 않게 놓여있는. 대형서점이나 인터넷 서점의 수많은 책들 중에서 무얼 골라야 할지 망설일 수밖에 없을 때,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여 고르긴 골랐으나 읽어보니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을 때, 나만의 그런 작은 서점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었다.

 

 

 

집에 티브이를 두지 않게 된 이후로 모든 방송을 스트리밍 서비스로 보게 되었다. 영화든, 드라마든, 뉴스든. 그냥 틀어놓으면 수동적으로 보게 되는 티브이 시청과는 달리 이건 매우 적극적인 행동이 전제된다. 무얼 볼지 결정해야 하고, 그 선택에 대한 후회도 온전히 내 몫이 되기 때문이다. 넷플릭스나 왓챠플레이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는 그래서 고객의 선호도를 분석해준다. 넷플릭스는 그 분석을 바탕으로 콘텐츠를 자체 제작하기도 한다. 고객은 접속과 동시에 자신에게 추천되는 프로그램의 목록을 볼 수 있다. 얼마나 좋아할지, 그 확률을 숫자로까지 표시해준다. 그러니까 내가 좋아할 가능성이 있는 드라마, 99프로 일치. 내가 전에 보았던 것과 유사한 다큐멘터리, 90프로 일치. 전체고객의 상위 5프로가 최근에 가장 좋아한 영화. 뭐, 이런 식이다. 숫자의 유혹이 놀랍다. 내가 99프로 좋아할 가능성이 있는 드라마라니, 이건 반드시 봐야 한다까지는 아니더라도, 기왕이면 89프로 좋아할 가능성이 있는 것보다는 이걸 먼저 보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나서, 시청 후에 드는 생각. 내가 정말 이걸 좋아하나? 나의 99프로가 이걸 좋아하나? 그러나, 때때로, 아니 실은 아주 자주 나의 1프로는 말한다. 이런, 나는 이걸 안 좋아하는 걸.

집에 티브이가 없고, 게다가 종이 신문을 정기 구독하지 않는다면,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아는 것 역시 매우 적극적인 행위가 된다. 알려고들면 그렇다는 얘기다. 자신이 좋아하는 뉴스매체를 인터넷에서 선택해서 그중에 관심이 가는 뉴스를 다시 선택해야 하고, 그와 관련된 다른 매체의 뉴스들을 비교해서 봐야 한다. 수고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포털에 기대게 된다. 포털은 넷플릭스처럼 ‘당신이 좋아할 만한’, 혹은 ‘당신에게 중요한’ 몇 프로의 가능성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간판에 걸리는 순간, 그것은 이미 100프로 중요한 것이 된다. 99프로도 아니고 100프로다. 지나치게 사소해서 티브이 뉴스를 틀어놓았다면 귓전으로 그냥 흘려들었을 뉴스까지도 그날의 가장 중요한 뉴스가 된다. 책이 소개되면 가장 핫한 책이 되고, 옷이 소개되면 그즈음의 패션이 된다. 그 중요한 뉴스가 어떤 매체의 것으로 소개되었는지에 따라 느닷없이 보수적인 의견을 따라가게 되기도 하고, 전혀 반대로 진보적인 입장에 서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문득 하게 되는 생각. 이런, 나는 아무 생각도 없는 걸? 더 나아가 이런 생각도 하게 된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그러니까 내가 아는 건 세상이 아니라 네이버뿐이라는. 최근에 1994년의 신문을 볼 일이 있었다. 그해 1월1일의 어느 신문 특집 기사는 향후 IT산업의 발전이 우리 사회를 어떻게 변모시키게 될지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 내용이 재밌다. 앞으로는 티브이 프로그램을 선택해서 볼 수 있는 날이 올 거라든가, 누구나 ‘휴대용화면전화기’를 소유하게 되어 어디서든 실시간으로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든가. 농담처럼 이런 우려도 덧붙여 있다. 회사원들은 근무시간에 주식시세를 검색하다가 상사에게 들키는 불상사를 경험하게 될 수도 있을 거라는. 그 모든 예측들은 다 사실이 되었다. 신년에 보는 토정비결도 아니고, 자료를 통한 과학적 예측이니 그게 사실이 되었다고 해서 놀라울 것은 없다. 미래는 늘 현재가 품고 있는 씨앗을 통해 발아하는 법이니. 좋은 미래든, 나쁜 미래든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불행히도 앞으로의 미래는 나라는 개인이 아니라 나라고 예측되어지는 어떤 조건치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포털 뉴스의 불공정한 배치가 문제가 되면서 앞으로는 뉴스 배치를 알고리즘화하는 쪽으로 개선한다고 한다. 단순하게 말하면, 개인의 취향, 개인의 선호도에 따라 뉴스를 자동으로 배치한다는 뜻인 모양이다. 내가 좋아하는 뉴스와 당신이 좋아하는 뉴스가 다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내게 중요한 뉴스와 당신에게 중요한 뉴스도 다를 수 있다는 뜻이다. 넷플릭스에서는 이런 과정을 ‘큐레이션’ ‘레시피’라는 말로 설명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고객들이 스스로 알지 못하는 숨어 있는 취향을 찾아주는 서비스라고까지 했다. 놀랍지 않은가. 내가 좋아하는지도 모르는 좋아하는 것을 찾아주는 서비스라니. 마찬가지로 내가 중요한지도 모르는 중요한 뉴스가 스스로 알아서 찾아오기도 한다는 뜻일 텐데, 그 반대를 생각하면 또 놀랍다. 이런,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걸.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이 분명히 올 터이고, 뉴스의 미로 속에서 길을 잃는 순간도 올 것이다. 길이 복잡해지고, 그 길이 엉망이 되기 전 단단한 지표를 먼저 세우는 게 필요할 터이다. 내가 중요하다고 판단하거나 판단하지 않거나, 단 한 건의 뉴스가 세상을 바꾸기도 하는 법이니.

동네 작은 책방 얘기를 했었다. 단골을 분석하는 게 아니라 공감하는. 통계적으로 파악하는 게 아니라 대화하는. 차 한잔, 혹은 맥주 한잔과 책 한 권, 그 책의 어느 한 페이지에 손을 얹어놓고 문득 창밖을 바라보는 시선. 그곳에는 나라고 추정되어지는 어떤 사람이 아니라 분명히 나 자신인 내가 있을 것 같다. 물론 세상은 결코 이렇게 단순하지 않고 단순해지지도 않겠지만, 그럴수록 더욱 확실한 지표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단순하지 않은 세상 속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단순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김인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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