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이 아래로는 집을 짓지 말라.” 2011년 동일본 지역이 지진에 이은 쓰나미로 큰 피해를 입었을 때, 언론은 아네요시 마을의 돌판에 새겨진 오래된 경고문에 주목했다. 쓰나미를 겪은 선조들이 남긴 경고를 잊지 않은 덕에 많은 사람이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는 얘기였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과거에서 보내온 메시지를 기억하지는 못했다. 비슷한 경고를 하는 돌판은 많이 있었지만, 후손들은 현대 기술을 믿은 나머지 그 경고에 무감각해졌거나 지역개발을 위해 경고를 무시했다. 망각에 걸리는 시간은 불과 백 년에서 수백 년 정도였다.

백 년이 아니라 만 년 후의 사람들에게 경고를 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미래 인류의 모든 호기심과 오해와 욕심을 누를 만큼 강한 공포를 느끼도록 해야 한다면? 지진에도 쓰나미에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는 돌판으로는 충분치 않을 것이다.

1990년대 초 미국 에너지부는 물리학자, 지질학자, 심리학자, 언어학자, 미래학자, SF 작가, 예술가, 건축가들을 모아놓고 바로 이런 요청을 했다. 미래로 보내야 할 메시지는 “이 땅을 파보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 땅에는 방사성폐기물이 묻힐 예정이었다. 방사성폐기물격리시범시설이 일만 년 동안 견뎌야 하는 위협은 지진이나 홍수 같은 자연현상만이 아니라 여기에 무엇이 묻혀 있는지 알지 못하는 인간의 침입이다. 일만 년 동안 사라지지 않을 경고 표지는 어떤 재질과 형태여야 할까? 일만 년 후에도 오해의 여지 없이 정확하게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표지는 어떻게 디자인해야 할까?

과학사학자 피터 갤리슨과 영화감독 롭 모스가 함께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컨테인먼트>(Containment·봉쇄)는 미국 에너지부의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인터뷰해서 방사성폐기물이 제기하는 기술적이고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딜레마를 추적한다. 다큐멘터리는 방사성폐기물 위험 표지라는 간단명료한 장치 하나가 어떻게 인류 문명에 대한 총체적인 성찰로 이어져야 하는가를 담담하게 그리고 섬뜩하게 보여준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전문가들은 30년, 100년이 아닌 10,000년짜리 미래예측 과제를 떠맡은 셈이었다. 이것은 최고 난도의 미래학이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일만 년 후의 인간이 어떤 존재일지, 만약 그때도 사회란 것이 있다면 그들이 어떤 사회에 살고 있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가 쓰는 언어가 일만 년 후에도 남아 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지금 우리가 위험과 공포의 상징으로 사용하는 기호가 일만 년 후에도 같은 의미를 가질까? 알 수 없다. 저장시설이 자리잡은 지역은 일만 년 후에도 지금처럼 인적이 뜸한 곳일까? 역시 알 수 없다.

전문가들은 온갖 지식과 상상력을 동원해서 미래의 인간들이 이 부지를 파헤치게 되는 시나리오를 작성했다. 2991년쯤에는 인류 전체가 문맹 상태에 빠질지도 모른다. 그러면 문자 표지판은 소용이 없다. 비슷한 시기에 휴스턴에서 로스앤젤레스까지 지하 터널을 뚫어서 기차가 다니는 시나리오도 만들었다. 터널을 파다가 저장시설에 구멍을 낼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11991년에는 우주로 나갔던 인간 전사들이 로켓을 타고 지구로 돌아오다가 이곳을 파괴할지 모른다는 상상도 했다. 더 간단하게는 20세기 인류가 이집트 피라미드에 도굴하러 들어갔듯이 폐기물 저장소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느낀 미래의 인간들이 삽을 들고 땅을 팔 것이라는 예측도 있었다. 로봇이 근처에서 작업을 하다가 바이러스에 걸려 더 이상 인간의 명령을 듣지 않고 큰 사고를 칠지도 모른다.

어떤 생각과 행동을 하는 존재인지 감을 잡을 수 없는 대상과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컨테인먼트>는 방사성폐기물 경고 표지를 디자인하는 전문가들이 맞닥뜨린 과제가 외계지적생명체 탐사에 나선 과학자들이 했던 일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977년 보이저호에 실어 우주로 보낸 레코드에는 인간과 지구의 사진, 지구의 소리, 인간의 음악이 담겨 있었다. 에너지부가 의뢰한 전문가들도 이처럼 우리와 전혀 다른 존재에게 보내는 강렬하고 효과적인 메시지를 만들어내야 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이 둘 모두 인간의 존재를 확장하는 대단한 일이었다. 경고 표지 디자인에 참여한 한 건축가가 인터뷰에서 말한 것처럼, 보이저호에 담긴 메시지를 통해 인류는 머나먼 공간을 향해 손을 내밀었고, 방사성폐기물 경고표지를 통해 인류는 머나먼 시간을 향해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우리가 일만 년 후의 미래 세대에게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 “여기 우리에게 끔찍한 것이 있는데, 오랫동안 끔찍한 채로 있을 것이다. 당신들이 그걸 알았으면 한다.” 2002년에 사망한 그 건축가는 인터뷰 영상에서 비장하게 덧붙였다. “우리에게 중요했던 것은 바로 당신이다. 일만 년 떨어져 있는 당신.”

<컨테인먼트는>는 이런 감동적인 교훈으로 끝나지 않는다. 외계지적생명체 탐사와 방사성폐기물격리시범시설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외계의 생명체에게 메시지를 보내면서 인류는 가장 자랑스러운 모습,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담으려 했다. 반면 방사성폐기물 경고판이 가리키는 대상은 인류가 가장 감추고 싶고, 감추어야 하는 모습이다. “우리의 근시안, 우리의 행동의 결과를 제대로 고려하지 못하는 무능함”이 그 경고판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는 최선의 지식과 전문가를 동원하여 미래세대에게 가장 절실하게 남겨야 하는 메시지가 방사성폐기물에 대한 경고라는 사실은 그다지 감동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미래 인류의 실수와 오해로부터 방사성폐기물을 지키는 일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할 수는 없다. 이것은 앞으로 적어도 일만 년 동안 인류가 놓치지 말아야 할 과제다. 지성과 지혜와 성의를 모아야 하는 미래에 대한 의무다.

<전치형 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