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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미국의 캔자스에서 있었던 심리학 리서치에 관한 이야기다. 일상에서의 행동심리 연구를 목적으로 진행된 이 조사는 당시로서는 매우 실험적이게도 철저한 필드 리서치로 이루어졌다. 나중에 <한 소년의 하루>라는 책으로 출판되기도 했는데, 제목처럼 한 평범한 소년의 하루를 고스란히 쫓아가는 내용이었다. 13시간에 걸쳐 8명의 전문 연구자들이 일곱 살짜리 아이를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면서 아이의 행동을 분 단위로 기록했다. 예를 들면 오전 7시1분의 기록은 이렇다. 아이는 일어나서 양말을 신었다. 그리고 8시24분의 기록. 아이가 허공을 향해 돌을 던졌다. 아무런 분석도 평가도 없는 이와 같은 기록이 장장 13시간, 책으로는 435페이지가 이어졌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책이 있다면 바로 이런 책이 아닐까 싶은데, 물론 이 연구자의 목적이 독자들의 인내심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을 리는 없다. 그는 이 세밀한 행동 자료가 향후 다양한 분석의 원재료로 쓰일 것이라고 믿었던 것인데, 불행히도 연구자들마저 그 지루함과 무미건조함에 고개를 내둘렀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 책은 연구자들조차 읽지 않는 책이 되었다는 것이다.

오래전에 짧게 읽었던 이 연구에 대한 이야기가 문득 떠오르는 것은, 좀 엉뚱하기는 하지만, 바로 오늘 우리나라 일곱 살짜리 아이의 하루를 쫓아가는 연구가 있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아침에 일어나 양말을 신는 것은 같을 것이고 아침을 먹는 것도 같을 것인데, 그다음부터의 상황은 위의 연구처럼 지루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흥미진진하게 진행될 것이 자명하다. 아이는 갑자기 유치원에 갈 수 없고, 한번도 가보지 못한 긴급 돌보미센터에 가야 하고, 가서는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그 낯선 곳에 자신을 떨구고 가는 엄마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대면해야 하고,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는 흥분은 잠시뿐, 마침내 불안하고, 일곱 살짜리 아이가 알아서는 안될 고독과 공허를 알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아이의 일상을 다룬 자료가 나온다면 아마도 연구자들은 이것을 심리학 자료로 쓰는 대신 사회정치사적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오래된 이야기를 잠깐 하자. 아이를 키우는 것이 어려운 것은 지금이나 예전이나 다를 바가 없어서 아이를 봐줄 곳을 찾지 못해 애를 먹던 기억이 아직도 사무친다. 유아원이나 어린이집 같은 건 드물었고 유치원은 다섯 살이 된 아이들만 받아줬다. 게다가 일찍 끝났다. 그래서 아이는 윗집에도 맡겼고, 조금 큰 후에는 발레학원에도 맡겼다. 발레를 가르치려는 게 아니라 그 동네에서 유일하게 그 나이의 어린아이를 받아준 곳이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그 학원의 소파에서 잠만 자다 왔다. 다른 아이들보다 한 살 어려서 유치원에 들어간 아이는 밥을 잘 안 먹었다. 그 유치원의 규칙이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집에 보내지 않는 것이어서 혼자 남은 아이는 10~20분이 아니라 한 시간 두 시간씩 혼자 유치원에 남아있어야 했다. 텅 빈 운동장을 혼자 걸어 나오던 아이의 모습이 지금도 어찌나 선명하게 떠오르는지. 경제적으로도 늘 어려웠다. 아이를 잘 봐주는 곳을 찾으려면 돈이 드는데, 그 돈을 벌려면 일을 해야 했고, 일을 하려면 아이를 어디에든 맡겨야 했다. 아이를 잘 키우려고 돈을 버나, 아이를 어디다 맡기려고 돈을 버나. 경제의 악순환뿐만 아니라 슬픔의 악순환이기도 했다.

호소다 마모루의 애니메이션 <늑대아이>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은 아들이 집을 떠날 때, 엄마가 눈물을 쏟으며 말하는 장면이다. “나는 너한테 해준 게 아무것도 없는데.” 이 작품을 본 관객들은 물론 다 안다. <늑대아이> 속 엄마는 해준 게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라 해줄 수 있는 것 이상을 했던 사람이다. 오죽하면 늑대아이를 키운 엄마가 아닌가. 상황은 달라도 모든 엄마 마음은 같다. 뭐든지 다 주고 나서도 모자라게 준 것 같은, 더 줄 수 있는 게 있는 것 같은, 더 줄 수 있는 게 없어도 더 주고 싶은. 그래서 그 장면에만 이르면 그냥 눈물이 쏟아진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은 엄마가 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이 오직 생물학적 부분에 관한 이야기라면 맞는 말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냥 엄마가 아니라 내 아이를 키우고 그러면서 동시에 세상을 키우는 엄마에게는 이렇게 말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은 엄마 혼자서 하는 일이 아닌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당신이 하는 일이 아니라고. 그것은 시스템이 해야 하는 일이고, 지자체에서 해야 하는 일이고, 나라가 해야 하는 일이다. 그것도 아주 잘해야 하는 일이고, 더군다나 완벽하게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니 애국같은 말 집어치우고, 안전하게 크고, 유치원에도 걱정없이 다니고, 일하는 엄마 걱정도 그만 시키고, 장려금·보상금·긴급대책 그런 거 말고 처음부터 끝까지 안심할 수 있는 그런 게 필요하지 않겠나. 그러면 나머지는 다 알아서 할 것이다. 엄마가 아닌가. 나머지는 다 알아서 하는 정도가 아니라 한없이 넘치도록 할 터이니.

<김인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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