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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등에 올라탄 사람은 코끼리를 부리려고 한다. 앞으로, 뒤로, 앉아, 일어서. 그런데 불행하게도 코끼리 귀가 자기 등에 올라앉은 사람의 말을 잘 듣기 위해 그렇게 큰 것은 아니다. 노련한 조련사라면 모를까, 처음 코끼리 등에 오른 사람은 코끼리한테 휘둘리기 십상이다. 코끼리는 지능이 높고 수명도 사람 못지않게 길다. 어린아이가 탔다면 나이 많은 코끼리가 업신여길 수도 있다. 코끼리를 감정에, 사람을 이성에 빗댄 우화다.  

우리의 기대와 달리 사람(이성)은 코끼리(감정)한테 번번이 진다. 우리는 흔히 이성이 감정을 지배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이성이 감정을 감당하지 못한다. 더 놀라운 사실은 우리 감정이 구석기 시대로부터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코끼리 잔등에 올라탄 사람은 21세기 문명의 절정에서 현기증을 느낄 지경이지만 코끼리는 여전히 1만년 전 사바나 지역에서 물과 먹이를 찾아다니고 있다.

코끼리는 현실정치이고 코끼리 등에 탄 사람은 시민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코끼리 등에 탄 시민이 아무리 소리쳐도 정치인은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 바로 앞에 벼랑이 있다고 소리쳐도 코끼리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코끼리 귀에 경 읽기다. 우화는 얼마든지 변주된다. 코끼리는 우리를 옥죄는 생산력 제일주의일 수도 있고 우리의 불합리한 신념체계일 수도 있으며 우리의 완고한 삶의 방식일 수도 있다. 이런 코끼리 위에 올라탄 우리는 여전히 어린아이다.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우려하는 과학자들에게 코끼리는 기후변화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이자 미국 오바마 행정부에서 에너지부 장관을 역임한 스티븐 추 박사는 기후변화가 ‘핵전쟁보다 더 위협적’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추 박사 같은 전문가들에게 ‘기후변화 코끼리’는 아예 듣지 않거나 앞을 못 보는, 아니 걷지조차 못하는 장애를 앓고 있다. <기후변화의 심리학>의 저자 조지 마셜은 기후변화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다음과 같이 비유한다. 코끼리 잔등에 탄 사람이 과학 전문지 기사를 소리 내 읽어주는 동안 코끼리는 바나나를 찾아 헤매고 있다.

봄소식과 함께 미세먼지 경보가 연일 스마트폰을 시뻘겋게 물들인다. 긴 겨울 끝에 마주하는 꽃소식은 반갑기 그지없지만 외출할 때마다 뿌연 하늘을 올려다보며 마스크를 챙기는 심사는 안타까움을 넘어선다. 분노와 좌절, 불안과 우울을 넘어 무기력에 시달리게 한다. 급기야 며칠 전 호주의 17세 소년이 물마시기를 거부하다 병원 문을 두드렸다는 외신 보도를 접했다. 그 소년은 수백만명이 가뭄으로 인해 죽을 수도 있다는 걱정 때문에 물을 마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담당의사는 소년의 증상을 ‘기후변화 망상’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지난 2월 미국 애틀랜타에서 열린 ‘기후 및 건강 회의’는 기후변화가 개인의 정신건강에 광범위한 영향을 준다고 경고했다. 하버드대 공중보건대학원의 보고에 의하면 지구 온도 상승이나 대기 오염이 사람들의 공격성을 높여 갈등을 부추길 뿐만 아니라 불안과 우울증에 시달리게 한다. 미세먼지가 신경 염증을 일으켜 알츠하이머, 인지장애 등 신경 및 정신질환 발병률도 높인다는 것이다. 그간 산업이나 경제 측면에서만 논의되던 기후변화가 이제 일상적 삶을 뚫고 우리 내면 깊숙이 진입한 것이다. 기후변화는 더 이상 우리 몸 바깥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움직이지 않는 것일까. <기후변화의 심리학>을 펴낸 조지 마셜이 이 화두를 붙잡고 비관론은 물론 낙관론까지 파헤쳤다. 기후변화 전문가이자 열정적인 현장 활동가인 마셜은 왜 홍수, 가뭄, 폭풍 등 자연재해 피해자들이 기후변화에 대해 말하기를 꺼리는가, 사람들이 인류 종말을 다룬 영화는 즐겨 보면서 왜 자신의 미래는 구체적으로 상상하지 않는가, 왜 과학자들이 ‘적’으로 간주되는가, 아이가 생기면 기후변화에 관심이 줄어드는 이유는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나섰다. 마셜에 따르면 기후변화는 과학 대 이권, 진실 대 허구의 미디어 싸움이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는 우리의 능력, 즉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딱히 알고 싶지 않은 것은 무시해버리는 인간의 비범한 재능(확증 편향)에 대한 궁극적 도전이다.

마셜은 기후과학자들이 불확실성을 강조하면서 추상적 개념을 사용하지 말고 감정적 뇌(코끼리)에 호소하는 이미지, 비유, 이야기를 활용해야 기후변화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또 미래의 어느 날 ‘세계 기후대전 때 엄마 아빠는 무슨 일을 했나요?’라는 자녀들의 물음에 답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권고한다. “우리는 지구를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게 아니라 자녀들에게서 빌려온 것”이라는 전 호주 환경부 장관 모스 카스의 메시지를 유념하라는 것이다.

이미 자녀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스웨덴의 열여섯 살 소녀 그레타 툰베리가 펼치고 있는 ‘기후를 위한 등교 거부 운동’이 그중 하나다. 툰베리는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에 참가한 190개 나라 대표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이 아이들의 눈앞에 있는 미래를 빼앗고 있다.” 툰베리는 한 사람이 변화, 즉 ‘완전히 새로운 사고방식을 필요로 하는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는다. 툰베리의 등교 거부 운동은 전 세계 270개 지역으로 번졌으며 오는 3월15일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청소년들이 등교 거부 운동을 벌일 예정이다.

<이문재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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