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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일을 당했을 때 전화위복이 될 거라는 위로의 말을 듣는다. 액땜으로 생각하라며 토닥여주는 사람도 있다. 살아오면서 꽤 흔하게 받았던 위안이다. 벌어진 일을 수습해야 하는 나는 실제로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못하고 그 말을 건네는 이의 따스한 마음을 기억하곤 했다. 그런데 2주 전에 일어난 작은 사건으로 나는 스스로 전화위복의 말을 실감했다. 삶이란 끝없는 절망도 희망도 아닌 굴곡을 거쳐야 하는 일이란 것을, 개인적인 체험을 오롯이 받아들여 인간적인 이해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새겼다.

열세 명의 일행과 중국 칭다오로 워크숍을 가는 중이었다. 인천국제공항은 이른 아침부터 붐볐다. 모바일 탑승권을 챙기고 화물로 부칠 짐도 없는 나는 느긋하기 이를 데 없었다. 칭다오에 가면 맛있는 맥주 한 잔을 하거나 큐레이션이 특별한 개성 있는 서점을 방문해야지, 저녁 무렵에는 일행들과 기쁜 대화를 나누어야지, 기대감에 들떠 발걸음도 가벼웠다.

문제는 꼭 사야 할 면세 품목이 숙제처럼 있었다. 화장품이었다. 일반 매장보다 꽤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으니 나름의 기회였다. 화장품 품목이 밀집된 가게는 같은 형태이지만 브랜드별로 꽤 거리가 있었다. 출국 심사가 끝난 지점에서 가장 가까운 면세점에 갔을 때 찾았던 물품은 품절이었다. 친절하게도 다른 브랜드의 면세점에는 있을 거라며 위치를 알려주었다. 잠시 망설였다. 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욕심이 앞섰고, 면세점에 도착했을 때 이미 불길한 징조가 시작되었다. 그 물품 하나만 사기에는 유혹적인 혜택이 너무 많았다. 하나보단 세 개가 더 이익이 되는 것인데 다른 두 개는 또 무엇을?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품목을 고르고 계산했을 때는 보딩 시간이 이미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신이 있었다. 캐리어 가방이 한손에 묵직하기는 하지만 달리기라면! 그런데 빈 공간도 아니고 주자를 위한 트랙도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조금만 비켜주세요”를 연발했지만, 준비성 없이 서두는 사람에게 탑승구는 가깝지 않았다. 무빙워크에서 한 사람의 양해를 구해 밀치고 몸을 내밀었는데, 캐리어가 따라오지를 못했다. 넘어졌다. 오른손으로 캐리어를 쥐고 있었기에 그대로 왼쪽으로 미끄러진 것이다. 그래도 바로 일어나서 또 달렸다. 탑승구에 가까워지자 얼굴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스카프에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내 얼굴을 본 일행 모두 놀라고 당황했다. 혹시 탑승할 수 없는 것일까, 짧은 시간 함께할 이들에게 미안함과 자책감이 밀려들었다. 항공사에서 탑승하면 구급치료를 할 수 있다고 안심시켜주었다. 기내에서 얼음 찜질과 응급처치를 받는 신세가 되었다. 머릿속에는 온통 ‘화장품이 뭐라고, 나는 바보야, 얼굴은 이제 완전 상했는데 무슨 화장품이야’ 같은 즉석 노래만이 돌고 돌았다.

중국의 대형병원 응급실 체험도 했다. 말도 통하지 않는 데다 습윤밴드 하나 없이 그저 붕대만 처치받아 세면이 힘들었다. 물론 귀국한 날 한국의 피부과 병원을 찾아 답답함을 해소했다.

비행기 안에서 맴돌던 ‘바보의 랩’은 계속되었다. 가사가 조금 바뀌었다. ‘무빙워크에서 뛰다니 무슨 매너야, 체크인을 했는데 비행기가 날 두고 떠날 거라고 생각했다니 나는 바보야.’

그런데 며칠 뒤 축복처럼 전화위복의 심리가 작동했다. 내가 넘어질 때 누군가를 밀치지 않아 부상자가 더 없었다는 것, 얼굴뼈 같은 구조적인 부상이 아니고 피부 상처였다는 것, 만난 사람들이 밴드 붙인 얼굴에 대해 굳이 묻지 않는다는 것, 무엇보다 상처는 곧 아문다는 것이다. 앞으로 계획 없는 상품의 즉흥 구매는 책과 음반만 예외로 하자고 다짐했다.

함께 갔던 사람은 덕분에 잊지 못할 칭다오 워크숍이 되었다고 말해주었다. 물론 나에게는 더 말할 나위 없는 특별한 칭다오행이 되었다. 몸과 마음의 상처 치유에는 극복 단계가 있었다. 앞사람이 빨리만 비켜주었더라면 하는 부정적인 원망, 뛰지 않았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 섞인 우울, 병원 치료에 대한 감사와 긍정의 수용, 이제 곧 아문다는 안도를 거치자 비로소 내 몸과 삶이 빚진 것들이 떠올랐다.

이 소중한 마음을 사고를 겪으면서까지 얻을 일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이 글을 쓰는 내내 위로하던 얼굴과 고마운 목소리들이 떠오른다. 나의 지극히 사적인 체험을 통해 관계와 삶을 명상하게 된 것이다.

다시 공항에 간다면 사람들을 관찰해보려고 한다. 혹여나 다급한 표정으로 뛰는 사람이 있다면 말해주리라. 조심하세요, 비행기보다 몸이 먼저예요.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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