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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여순감옥에 가본 적이 있다. 최근엔 어떤지 모르겠으나, 10여년 전 그때 외국인들에겐 관람 제한이 있었다. 허가받는 과정이 필요했다는 뜻이다.

한겨울이었고, 관람객들이 적을 철에 평일 방문이라서 그랬는지, 관람객이라고는 우리 일행밖에는 없었다. 따로 가이드도, 관람객도 없으니 주변을 도는 공안이나 경비원도 보이지 않았다. 넓은 감옥이 어찌나 조용한지 마치 이 세상 밖의 다른 곳 같았다.

그러나 한때 그 감옥은 한꺼번에 2000명 이상의 수감자를 수용했던 곳이고, 그 수감자들을 온갖 방식으로 고문했던 곳이며, 그들을 사형에 처했던 곳이었다. 교수형에 처해진 사형수의 시신이 아래로 떨어져 내리면 그 시신을 그대로 받아 옮길 수 있게 바닥보다 낮은 아래에 항아리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외침을, 비명을, 불의에 항거하는 모든 정의를 한입에 삼켜버리는 항아리였다.

안중근 의사도 그렇게 가셨다. 지금 여순감옥에는 안중근 의사 추모관이 생겼다는데, 내가 갔던 그때는 한글로 된 안내판과 추모글이 있었을 뿐이다. 그 앞에 서서 한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너무 조용해서, 시간이 아주 멈춰버린 듯이 그 감옥의 고요가 너무 깊어서, 뜻밖에 짐작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경건해졌던 순간이었다. 역사관람지라고 해서 문득 찾아갔다가 갑자기 부끄러워졌던 기억이 난다. 한 위대한 인물의 죽음 앞에서, 평화로운 내 삶이, 생각 없는 내 삶이 통째로.

상해임시정부를 관람한 적도 있다. 그 건물이 너무 소박해 뜻밖이라고 생각했는데, 안으로 들어가보니 소박한 게 다 뭔가.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순국한 열사들의 사진이 있었다. 그 사진들을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떤 사건, 어떤 순국으로만 알고 있던, 그러니까 교과서적인 지식으로만 알고 있던 사건으로 생을 마감한 열사들은 한때 시퍼렇게 살아있던 청춘들이었다. 그 청춘들의 나이가 한결같이 너무 어렸다. 스무살, 스물몇살….

그 열사들의 사진을 보고 있을 때 나는 이미 그들보다 두배쯤은 더 살고 있었다. 역사에 빚진 것뿐만 아니라 그 역사 속의 젊음들에 빚진 것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부끄러웠다. 느닷없이, 생각도 못하고 있다가, 통렬하게 부끄러워지던 순간이었다.

1909년 명동성당 앞에서 이완용을 습격해 깊은 자상을 남겼으나 목숨까지는 뺏지 못했던, 그러나 그로 인해 결국 사형을 당한 이재명 열사 역시 당시 스물세살이었다. 재판정에서 일본인 판사가 공범을 묻자, 이재명 열사가 답한 대답이다. 2000만 대한민족 모두라고. 나는 그 시대에 살지 않았으나, 그 시대에 살았더라면, 나 역시 이재명 열사의 공범이다. 우리 모두 그러하겠다.

역사책 읽는 걸 좋아하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읽는 건 어떻게 해도 즐거워할 수가 없는 일이다. 고통스럽다고 말하기에 앞서 분노와 답답함을 감당할 수 없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분노와 답답함은 일본 제국주의와 그 제국주의자들을 향해서이기도 하고, 내 나라의 역사와 그 역사 속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렇다. 개인적 취향이 그러하다 보니 일부러 그 시절 역사를 찾아 읽는 경우가 거의 없다. 여순감옥도, 상해임시정부도 일부러 찾아갔다기보다는 관광 일정에 포함이 되었을 뿐이다. 이재명 열사에 대한 기록은 소설을 쓰느라고 찾아보았었다. 의도치 않게, 그 순간들, 그 기록의 한 장면들이 깊숙이 남았다.

여순감옥을 생각하면 그 감옥의 뜰에 내려앉아 있던 고요와 그 고요 전부를 빨아들일 것 같던 항아리가 떠오르고, 그 항아리 속에서 여전히 공명하고 있는 것 같은 어떤 소리들을 듣는다. 부끄러워하는 일 말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아주 때때로, 문득문득 부끄러워할 수라도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다.

부끄러움에 대해서라면 윤동주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시들은 시대를 넘어, 역사를 넘어 한 존재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성실한 토로들이다. 윤동주가 여전히 가장 사랑받는 시인 중의 한 사람인 이유는 그 진실함 때문일 것이다. 보통사람들의 슬픔, 보통사람들의 간절함, 보통사람들의 부끄러움, 그 모든 것들에 대한 가장 성실하고 진실한 토로. 그의 시, ‘쉽게 쓰여진 시’에서 그는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쓰고 있다. 시에 관한 이야기뿐이겠는가. 그에게 시는 인생이고, 시대고, 그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관한 것이었을 터이다.

광복절이 지났다. 광복절인가 하다가 지나가고 광복절이었나 하면서 잊게 되는 날인데, 김구 선생이 쓴 ‘광명정대’라는 친필 휘호가 눈길을 끌었다. 안중근 의사의 순국을 기념해 1949년에 김구 선생이 쓴 글인데, 그걸 간직하고 있던 독립운동가 김형진의 후손이 국가에 기증했다는 기사와 함께 그 휘호의 사진이 있었다.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수많은 기록보다, 아주 길게 쓰여진 이야기보다, 단 한 순간, 단 한마디, 단 한 문장이 가슴을 울릴 때가 있다. 광명정대. 누구나 그래야 할 일이나 누구나 그럴 수 있겠는가.

그나저나, 보통사람들은 부끄러움이라도 안다. 때때로 아주 성실하게 부끄러워하기도 한다. 그 보통사람들의 삶을, 다스리는 게 아니라 봉사하라고 선출되신 분들은 아예 그조차 모른다고 생각될 때가 많다. 물론 모든 정치가가 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좋은 정치를 하는 사람과 몰염치한 정치를 하는 사람을 구분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한 일인 줄은 안다. 분노와 답답함을 참아가면서라도 그래야 할 일이기는 하겠다. 또 한번의 광복절을 지나가며, 문득 떠올려보는, 여러가지 생각들이다.

<김인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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