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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소수민족인 사미족에게는 눈을 일컫는 단어가 200개, 혹은 300개 이상이라고 한다. 오로라의 고장인 극지방에 사는 사미족은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러시아 등지에 걸쳐 분포되어 있고, 전통적으로 순록을 쳐서 생업을 이어가던 민족이다. 그곳에는 백야도 있지만 일년에 몇십일씩 이어지는 극야도 있다. 해가 전혀 안 뜨는 몇십일 동안에도 눈은 내리고 쌓이고 또 얼어붙는다. 순록들은 두껍게 얼어붙은 눈과 얼음 아래에서 이끼를 뜯어먹으며 그 겨울을 생존한다고 한다. 순록과 함께 자신들의 삶도 결정되는 사미족에게 눈은 바라보고 감상해야 하는 아름다운 꽃송이들이 아니라, 감당하고 극복하고 경외해야 할 대상일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내리는 눈인지, 어떻게 쌓이는 눈인지, 또 어떻게 얼거나 해빙될 눈인지 하나하나가 다 생존과 연결되는 문제였을 터이다. 그렇더라도 그 단어가 200개 이상이라는 것은 놀랍다. 그 단어들은 도대체 다른 언어로 어떻게 번역될 수 있을까.

단어가 다만 뜻이 담겨 있는 말인 게 아니라 개인과 사회의 스토리를 담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눈이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순간, 누구에게나 그 눈은 다른 눈으로 떠오른다. 즐거운 기억이 있는가 하면 넘어져 깨지거나 발이 젖어 얼어붙었던 기억도 있을 것이다. 나로서는 중학교 시절, 폭설이 내려 서울 한복판의 교통이 마비되었던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데, 그 때문에 학교에 걸어가야 했고 오전수업을 빼먹을 수 있었다. 어떤 이유로든 수업을 빼먹는 건 달콤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이가 들어서는 쌓이는 눈을 보는 동시에 그 눈이 녹아 진창이 될 걸 생각하게 된다. ‘눈 녹듯이 사라진다’라는 말은 뭔가가 아주 깔끔히 사라졌다는 걸 일컫는 비유일 터인데, 사실 세상에 그런 건 없다. 흔적은 어디에나 남는다. 삶이란 그 흔적을 잘 품어 안거나 혹은 잘 처리해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좋은 흔적이든, 어떻게 해도 잘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든.

다시 사미족의 언어 얘기로 돌아가면, 그들에게는 전쟁이라는 단어가 없다고 한다. 지금은 여러 나라의 국경으로 분할되어 있지만 오래전에는 그 땅 전체가 그들의 것이었고, 자유롭게 움직이며 풀을 뜯어 먹는 순록들의 것이었다. 그러니 다툼이나 분쟁은 있어도 전쟁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인 에버리진의 언어에도 역시 전쟁이라는 단어가 없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오직 자연을 의지하고 경외할 뿐이던 그들의 성품 덕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보다는 부족 단위로 살아갔던 그들의 사회구조와 생산구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전적인 의미에서의 전쟁은 국가 간의, 혹은 일방의 국가를 상대로 해 무력을 사용한 싸움을 말한다.

그렇더라도 아예 전쟁이라는 단어가 없었다는 문장은 그냥 그 문장만으로도 마음이 따듯해지는 느낌이다. 우리에게는 전쟁이 너무 일상인 것만 같기 때문이다. 너무나 일상이어서 더는 그 뜻이나 어감조차 달라지고 무감해져 버린. 전쟁 같은 육아, 전쟁 같은 입시, 전쟁 같은 사랑, 통째로 전쟁 같은 삶. 여전히 분단국가에서 살아가고 있음에도 우리에게 전쟁이라는 단어는 국가 간의 무력충돌보다는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야 하는 각박한 삶에 더 어울리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 사실이다.

내가 어렸던 시절에는 전쟁이라는 단어가 6·25로 통했다. 동란이라고도 했다. 어른들의 얘기가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얘기로 여겨졌었다. 그러나 반공이라는 말은 익숙했고, 익숙한 정도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말이었고, 표어 경연대회가 열리면 자동적으로 반공 표어를 지었고, 포스터 그리는 시간에는 빨간색 크레파스가 제일 먼저 닳아 없어졌다. 전쟁이라는 단어는 권력의 가장 강력한 보호수단이었고, 그래서 국경과 국경 사이에서가 아니라 내가 사는 내 나라 안에서 더 가혹하게 작용했다.

단어는 때로 그것이 본래 가지고 있는 뜻보다 더한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종전이라는 말도 그렇다. 종전은 끝나는 말이 아니라 시작하는 말이다. 물론 종전이 된다고 해서 우리 일상 속 전쟁 같은 삶이 갑자기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정치판도 여전할 것 같고, 혐오스러운 정쟁도 여전할 터이고, 어쩌면 더할 것 같기도 하다. 한순간에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200개가 넘는 단어로 눈을 표현한 북유럽의 사미족 언어에 빗대 생각해볼 때, 우리도 200개쯤의 단계를 거치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발전적인 미래에 있지 않겠나 싶다. 단어에 스토리가 쌓여 풍성해질 것이고, 풍성해진 만큼 유연해질 것이다. 단어가 또 다른 단어를 낳아 새로운 기회가 되기도 할 것이다.

사미족을 배경으로 한 소설 <라플란드의 밤>에는 흥미로운 챕터 제목들이 나온다. 극야가 끝난 후의 일조시간을 챕터의 제목에 기록해둔 것인데, 첫날 해가 뜨고 해가 지기까지의 일조시간은 27분이다. 이토록 긴 어둠은 언어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오랜 어둠, 혹은 오랜 역사가 담겨 있는 단어일수록 그 뜻이 깊을 것은 당연하다. 우리에게는 종전이라는 단어가 그럴 것이다.

<김인숙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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